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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 크기 | 미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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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국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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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규격 : 가로13 세로23.5(cm)
조선시대 명필이신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의 묵적입니다.
작품의 좌측 에' 계묘년 원월 28일 淳' 이라는 착함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1723년 (계묘년 43세)에 쓰여진 작품입니다
행서와 초서가 어우러진 필체는 담백하고 절제된 기품을 지니며,
붓끝의 기세와 리듬 속에서 문인의 고아한 풍모가 드러납니다.
윤순은 조선 숙종,영조 대의 명문대가로 ,
학문과 글씨 모두 뛰어나 당대의 문인들 사이에서도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조선 명필 윤순의 글씨작품은 만나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희소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김정희(金正喜)는 『완당집(阮堂集)』에서 “백하의 글씨는 문징명(文徵明)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인명록을 이기해 봅니다
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白下)·학음(鶴陰). 만년에는 만옹(漫翁)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명신 두수(斗壽)의 5대 손으로, 지평세희(世喜)의 아들이며 유(游)의 아우이다
조선시대 양명학의 태두인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이며 정제두의 아우 제태(齊泰)의 사위이다.
그는 당시 조정과 산림에 있는 선비들의 허위와 타락을 논하면서 양심적 시정(施政)과 개혁을 주장하였다.
1723년(경종 3) 응교로 사은사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7년(영조 3) 이조참판으로 대제학을 겸임하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감호제군사(監護諸軍使)가 되었으며,
1729년 공조판서가 되고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35년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1739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으며, 그 뒤 평안도관찰사로 관내를 순찰하던 중 벽동(碧潼)에서 객사하였다.
윤순은 시문은 물론 산수·인물·화조 등의 그림도 잘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글씨의 대가로 우리나라의 역대서법과 중국서법을 아울러 익혀 한국적 서풍을 일으켰다.
그의 문하에서 이광사(李匡師) 등이 배출되었다.
서풍은 왕희지(王羲之)·미불(米芾)의 영향이 많은데,
그의 필적을 보면 소식(蘇軾)체로 쓴 것도, 동기창(董其昌)체에 가까운 것도 있다.
그는 옛사람의 서풍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대가의 역량을 지녔다. 특히, 행서는 각가(各家)의 장점을 조화시켜 일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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