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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품 크기 | 미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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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조국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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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조상경(趙尙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엄(趙曮)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진관(趙鎭寬)이다. 어머니는 홍익빈(洪益彬)의 딸이다. 형은 국구(國舅) 조만영(趙萬永)이다.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바로 응교에 임명되었다. 그 해 형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도당록(都堂錄)에 선입되었다. 1822년 함경도암행어사로 복명 후 대사헌에 특진하였다. 1826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조참의·대사성·세손좌유선(世孫左諭善)·제학·예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30년 세자[익종(翼宗)으로 추존]가 죽자 세손부(世孫傅)·우부빈객으로서 나이 어린 세손의 보호에 힘썼다. 1834년 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바로 이조판서에 기용되고, 이어 대제학, 호조·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훈련대장 등 군사권을 장악한 형 조만영과 함께 풍양 조씨 세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839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기해사옥(己亥邪獄)]을 주도, 그 해 우의정에 올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찬진(撰進)하였다. 1841년(헌종 7) 영의정이 되어 안동 김씨를 압도하고 풍양 조씨의 세도를 확립했으나 1846년 형이 죽자 실세(失勢), 벼슬에서 물러났다. 1849년 철종 즉위 후 민심 수습의 일환으로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10여 년 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가 재정의 확보와 민생 문제에 대한 개선책을 자주 건의하였다. 또 이단이 성행하는 것은 정학[正學: 주자학(朱子學)]이 천명되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도산서원·화양서원 등의 서원에 대한 특전(特典)의 부여와 충신·의사의 포증(褒贈),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선비의 발탁 등을 주장하였다.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우리 나라의 금석문(金石文)을 수집, 금석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특히 1816년 성절사(聖節使) 일행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청의 금석학자 유연정(劉燕庭)과 교유, 그에게 조선 금석탁본(金石拓本) 수십 종을 기증하였다.
다음 해 귀국하여 김정희와 함께 비봉(碑峰)에 올라, 앞서 발견했던 비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확인, 68자를 심정(審定)하여 탁본을 작성하고 함께 엄밀한 고증을 거친 다음 이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와 함께 다시 유연정에게 보내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1847년 왕명으로 국조보감찬집청(國朝寶鑑纂輯廳)의 총재가 되어 정조·순조의 두 왕 및 문조(文祖: 익종) 대리청정 때의 보감을 편찬하였다. 뒤에 헌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운석유고(雲石遺稿)』 20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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