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현현거사/박영효/친필묵서/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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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국 한국

족자  44.5 X 185              작품 31.5 X 134

오래된 현현거사 박영효 친필 묵서 족자입니다.

수집된 그대로 등록하오니 사진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큰형을 따라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출입하면서 오경석(吳慶錫) · 유홍기(劉鴻基) · 이동인(李東仁) 등 북학파(北學派)의 영향을 받았고 김옥균(金玉均) · 서광범(徐光範)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78년 4월 오위도총부도총관, 1881년 1월 혜민서제조를 거쳐, 8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1882년 8월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을 위해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약 3개월간 체류했다.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 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 사절들과 접촉하며 문명개화론을 수용했다. 역관(譯官) 이응준(李應浚)이 1882년(고종 19) 5월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 때 최초로 제작한 태극기 문양을 기초로 하여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위치를 바꿔 태극기를 제작하여 일본에서 사용하였다. 수신사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의 속약정정(屬約訂定)을 체결했다.

같은 해 11월에 귀국해서 12월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한성부판윤으로 재임할 때 신문국(新聞局) · 순경부(巡警部) · 치도국(治道局) 등을 설치하여 신문 발간과 신식 경찰제도의 도입, 도로 정비 사업 등 일련의 문명개화 시책을 폈다. 그러나 민태호(閔台鎬) · 김병시(金炳始) 등의 반대에 부딪혀, 1883년 3월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다. 한성부판윤으로 재임하며 추진했던 신문창간은 1883년 8월 박문국(博文局) 설치와 10월 『한성순보(漢城旬報)』 창간으로 결실을 보았다.

광주유수로 재임하며 수어영에 연병대(鍊兵隊)를 신설하여 신식 군대 양성에 주력하였다. 군대 양성이 문제가 되어 같은 해 12월 면직되었다. 이처럼 정계 진출이 계속 좌절되는 가운데 1884년 2월 미국 유람을 계획하였으나, 미국의 불응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시 일본에 접근하여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군사적 지원에 대한 확약을 받아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친청(親淸) 세력을 숙청하고 새로이 내각을 수립했다. 이 내각에서 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前後營使兼左捕盜大將) 직을 맡아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즉각적인 개입에 삼일천하(三日天下)로 실패하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조선에서 집요한 송환 기도가 있었지만 일본 정부의 거부로 이뤄지지 않았다.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망명할 때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이름을 고친 뒤, 명치학원(明治學院)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1888년 초 일본에서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한 13만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개혁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개화상소(開化上疏)’ 혹은 ‘건백서(建白書)’이다. 상소문에서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국가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1893년 말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등 일본 유력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도쿄에 친린의숙(親隣義塾)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워 유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1894년 2월 조선의 밀명을 맡고 이일직(李逸稙) 등이 박영효를 암살하고자 친린의숙에 잠입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그해 7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11월 금릉위로 복작되었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자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관제개정으로 1895년 4월 내부대신으로 재직하면서 내각총리대신 서리로 일했다. 개혁은 근대적인 내각제도 도입, 지방제도 개편, 새로운 경찰 · 군사제도 확립 등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조선의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한편,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실과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주한 일본공사로부터 배척당해 1895년 7월 역모를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상소를 통해 자신의 역모 혐의의 부당함을 고종에게 호소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898년에 접어들어 이규완(李圭完) · 황철(黃鐵) · 이정길(李鄭吉) 등의 심복을 밀파하여 독립협회(獨立協會)와 제휴하여 정계 복귀를 기도하였다. 독립협회의 신진 소장파가 중심이 되어 박영효의 소환서용운동(召喚敍用運動)을 전개했다. 그러나 오히려 고종이 이를 구실로 독립협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1900년 7월에는 본국에 밀파되어 있던 이규완 일행에게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 음모를 지시하였다.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박영효의 정계 복귀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해 11월 궐석재판 결과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1907년 6월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체류하다가 상경하여,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와 접촉하여 특별사면을 받았다. 금릉위 직첩을 돌려받고 7월에 궁내부대신에 이어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으며 한일동지회(韓日同志會) 회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인 7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려고 하는 것을 반대하다 남정철(南廷哲), 이도재(李道宰)와 함께 체포되었다. 8월 황태자대리 진하행례(進賀行禮)에 불참했다는 죄목으로 남정철, 이도재와 함께 태형 80대에 처해졌다. 같은 달 23일 다시 경무청에 체포되어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 대신들을 암살하려고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908년 7월 한성재목신탄주식회사 대주주로 참여했다. 1909년 6월 단군 · 조선 태조 · 일본 천황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臣]의 위패봉안과 의식을 거행하는 친일단체인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총재에 선임되었다.

강제 병합 후 1910년 10월 일제가 회유하기 위해 주는 후작 작위와 1911년 1월 은사공채 28만원을 받았다. 2월 조양구락부유지회(調陽俱樂部維持會)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7월 문예구락부 총재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9월 사단법인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1918년 5월까지 재임했다. 1912년 1월 이문회(以文會)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8년에는 회두(會頭)를 맡았다. 1912년 2월 권업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9월 메이지[明治] 천황의 장례식에 귀족대표로 참석했다.

1913년 4월 조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했고, 7월 조선귀족을 위한 식림(植林)사업을 하는 보식원(普植園)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조합장으로 선출되었다. 1914년 7월 동래-대구 간 경편(輕便)철도회사 설립발기인으로 참여했고 9월 경성군인후원회에 조선귀족회 대표로 200원을 헌납했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의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5월 특별유공회원으로 250원을 기부했다. 같은 해 7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평의원, 10월 유공특별사원에 위촉되었다. 8월 가정박람회(家庭博覽會) 명예고문으로 추대되었고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8년 10월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될 때 이사로 임명되어 1930년 10월까지 역임했다.

1919년 1월 고종의 국장(國葬) 고문 및 석비전면서사원(石碑前面書寫員)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5월 경성방직㈜ 발기인으로 참여해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6월 조선농사개량㈜ 발기인, 12월 조선경제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0년 2월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4월 동아일보 초대 사장, 5월 노동대회 총재 및 조선산업은행 발기인 겸 창립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10월 경성부민 사립 피병원(避病院) 설립기성회 발기인으로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1년 2월 신민공사㈜ 취체역, 3월 사민회(四民會) 총재, 4월 보린회(保隣會)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인 1921년 4월 중추원 친임관(親任官) 대우 고문에 임명되었다. 5년간 중추원 고문으로 재임하면서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6년 3월 이완용 후임으로 칙임관 대우 부의장에 임명되어 1939년 사망할 때까지 연임하면서 매년 3,5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1년 4월 자치운동을 추진하는 유민회(維民會)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6월 조선산림회 고문 겸 명예회원, 7월 임시조선인산업대회 위원장, 9월 범태평양협회 회장, 10월 경성도시계획조사회 고문, 11월 조선불교대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12월 일선(日鮮)신탁주식회사와 조선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2년 1월 김윤식(金允植) 사회장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같은 해 4월 조선미술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1925년까지 매년 위원을 맡았다. 1922년 4월 조선건축회 명예회원, 6월 민우회 발기인 겸 회장, 9월 조선개조를 주장하는 조선협회 고문과 조선문제 간화회(懇話會) 간사, 10월 조선흥업은행 발기인, 11월 조선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3년 1월 고학생구제방법연구회 발기인, 3월 조선서적인쇄㈜ 발기인 겸 사장, 9월 관동진재의연금모집조성회 의장, 10월 간토[關東] 지진으로 인한 조선예산불감운동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 일본파견 실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2월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4월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발기인 겸 고문, 5월 조선구제원 고문, 11월 조선사문학회(朝鮮斯文學會) 회장에 추대되었다.

1925년 7월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사편수회 고문으로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1926년 3월 교육협성회 고문, 4월에는 순종 국장을 위한 장의위원, 5월 부위원장을 맡았고, 7월 조선토지개량㈜ 발기인 겸 취체역, 10월 조선문헌협회 특별찬조원, 11월 경성방송국 취체역을 맡았다. 이해 다시 조선귀족회 회장에 취임했다. 1927년 1월 다이쇼 천황 장례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같은 해 3월부터 1934년 4월까지 조선농회 부회장, 4월부터 1938년 4월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1928년 2월 조선귀족세습재산심의회 회원 및 조선귀족에 관한 심사위원,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겸 평의원을 맡다가 9월에는 총재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조선총독부 임시교육심의회 위원이 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같은 달 조선비행학교 창립위원회 위원과 7월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7월 왕공족(王公族)심의회 심의관, 8월 조선금융제도조사회 위원, 11월 처 박씨와 함께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1월 광영산업㈜ 발기인, 4월 조선물산장려회 경기지회 고문,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 8월 의주광산㈜ 대표취체역,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설립한 창복회(昌福會) 이사, 11월 조선산업㈜ 사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0월 이토 히로부미 20주기 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0년 5월 사단법인 조선공업협회 고문, 6월 화순무연탄㈜ 대표취체역, 9월 조선임산공업㈜ 대표취체역, 10월 조선식산은행 고문,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고문을 맡았다. 1931년 11월 만몽재주(滿蒙在住)동포후원회 고문 및 단군신전봉찬회 고문, 12월 조선공민교육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3월 조선간이생명보험사업 자문위원회 위원, 4월 재단법인 금강산협회 부회장, 5월 조선방송협회 부총재, 6월 대성원(大聖院) 고문, 7월 신흥 만몽(滿蒙)박람회 명예부총재, 12월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인 1932년 12월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어 1939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1933년 7월 중앙진흥협회 발기인, 8월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고문, 10월 조선신궁봉찬회 발기인 겸 고문으로 활동했다. 같은 달 이토 히로부미 25주기 입불식(入佛式)에 참석했다. 1933년 2월 30만원 이상의 재산을 소유했다. 1934년 3월 만주국 정부가 주는 건국공로장을 받았고, 4월에는 만주사변에 대한 공로로 일본 정부가 주는 금배(金杯)를 받았다. 같은 해 3월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34년 4월 재단법인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준비위원회 위원장, 7월 조선금융조합연합회에서 설치한 자문기구 고문, 11월 일만면화협회 조선지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35년 10월에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동상건설회 발기인으로 나섰고,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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