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간찰 1934년 가족을 중국에 탈출시킨 피난 시절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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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 크기 49cm x 18.5cm
제조국 중국

1934년 2월 중국 절강성 가흥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가족을 이끌고 타향을 떠돌아야 했던 독립운동가의 고달픈 현실과 그럼에도 고향에 두고 온 조상들의 묘소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인간 김구(金九)의 애틋한 효심과 책임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귀중한 간찰 한 편

49cm x 18.5cm


코베이 삶의 흔적 만만경매가 있는데요 저도 이 간찰을 모든 분들이 응찰할 수 있도록 시작가 1만에 올립니다.  아래 소견서를 붙였습니다.  잘 읽어보시고 응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종합 학술 소견서]

백범 김구 선생의 1934년 중국 가흥 피난 시절 간찰에 대한 재조명 및 고찰

: 가문사·기후학·첩보학·어휘사학적 다각도 고증을 중심으로

[목차]

1. 서언 (序言)

2. 간찰 원문 및 주해 번역 (全文)

3. 백범 김구의 중국 망명 및 체류사 고찰: 해외 체류의 공간적 증명

4. 백범의 중국 망명 및 이동사 고증: 대여정의 타임라인

5. 윤봉길 의거 후 현상금과 가흥(자싱) 피난사 고증

6. 안공근·피화국의 황해 해주 가솔 탈출 작전 고증

7. 가문사·유교 예법적 고증 (1): 큰아버지의 무자(無子)와 종통(宗統) 승계

8. 가문사·유교 예법적 고증 (2): 종손의 4대 봉사 의무와 ‘사위선묘(四位先墓)’

9. 기후학적·사회학적 고증 (1): 1934년(소화 9년) 구오월(舊五月) 대가뭄의 조선 삼남 지방 기후 연동

10. 기후학적·사회학적 고증 (2): 1930년 대공황 이후 장기화된 문중 민사 소송(訴訟事)의 실증

11. 언어사학적 고증 (1): 《백범일지》 친필본 수록 단어(생활·세계·결함·죄송·솔권 등)와의 완벽한 일치성

12. 언어사학적 고증 (2) (촉도지난·일반 간찰에서 볼 수 없는 舊五月 간찰 말미 표기)

13. 첩보사적 필연성 고증: 백범 김구 선생의 사설 한문 간찰이 국내에 단 한 장도 잔존하지 못했던 이유

14. 결언 (結言)

1. 서언 (序言)

본 감정 대상 유물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대부인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명의로 전래된 한문 서간(간찰)이다.

본 소견서는 직접 한국 근현대 첩보사, 안동 김씨 가문 계보, 1930년대 기후 보도 기록, 그리고 언어 변화사를 유기적으로 연동하여 도달한 학술적 발견을 담고 있다. 본 검증을 통해 본 유물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최고 등급의 현상금 속에서 백범의 간찰’임을 고증하고자 한다.

2. 간찰 원문 및 주해 번역 (全文)

본 서한의 한문 원문과, 백범 김구 선생이 당시 처했던 절박한 망명객의 상황 및 가문사적 고뇌를 완벽하게 고증하여 정립한 주해 한글 번역 전문은 다음과 같다.


[간찰 원문 (漢文 原文)]

音墨俱阻想應塵世

問所致也謹不審毒旱

兄軆上錦晏而令胤

侍否區區願聞不尠弟

二月初率眷轉到于茲

地客地人事何以方向耶

惟幸爲與庇下之免警

耳大抵年前訴訟事

何以結末耶事當晋慰

而似此踈濶於禮可乎於

情可乎罪悚難容

恕係若何顧此缺陷世

界弟之生活之難難於蜀

道之難嘆嘆奈何餘㐲託

弟之四位先墓都恃于

吾兄下燭焉餘只祝

兄禮上百福謹不備書例

舊五월 念일

回示爲好耳 金九再拜

[고증 주해 번역본 (韓譯 全文)]

오랫동안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편지도 드리기 어려웠으니, 생각건대 틀림없이 속세의 번잡한 일들 때문에 그리되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무슨 일로 이토록 연락이 끊기게 되었는지 안부를 여쭙니다.

삼가 꼼꼼히 살피지는 못했으나, 이 모진 가뭄 속에서 형님의 몸과 일상이 비단처럼 늘 편안하시며 아드님이 곁에서 잘 모시고 있는지도 궁금하며, 저의 구구한 마음으로 알고 싶은 바가 참으로 적지 않습니다.

이 못난 아우는 지난 2월 초에 (나라 안팎의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 낯선 타향 땅(중국 가흥 객지)으로 거처를 옮겨 이르게 되었습니다. 목숨을 건 망명객의 신세로 떠도는 객지에서의 인간사가 어찌 정해진 방향이 있겠습니까마는, 오직 다행스럽게도 형님께서 멀리서나마 보살펴 주신 덕분에 별다른 우환을 면하고 지낼 뿐입니다.

대저 몇 년 전에 (고향에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있었던 그 소송 일은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요. 일의 마땅함으로 본다면 제가 직접 나아가 위로해 드려야 하거늘, 이처럼 소원하고 멀어지게 지냈으니 이것이 예의에 맞다 하겠으며 정에 맞다 하겠습니까. 참으로 죄송하고 송구스러워 용서받기 어려우니, 저를 처분해 주심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돌이켜보니 이 결함 많은 불완전한 세상에서 (나라 잃은 아우의 하루하루 살아가는) 곤궁함은 촉나라로 가는 길의 험난함보다 더 어려우니, 탄식하고 탄식한들 어찌하겠습니까.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망명길을 앞두고) 남은 정으로 엎드려 간곡히 부탁을 올립니다. (고향 땅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온) 아우의 사위(네 분) 조상 무덤을 모두 우리 형님께서 보살펴 주시기만 믿고 바랄 뿐입니다.

남은 마음은 다만 형님의 삶 위에 온갖 복이 가득 깃들기를 빌 뿐이며, 서둘러 적느라 삼가 편지의 예법을 다 갖추어 쓰지 못합니다.

음력 5월 스무날에, 답장을 보내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김구(金九)가 절하며 올립니다. (재배 올림)

3. 백범 김구의 중국 망명 및 체류사 고찰: 해외 체류의 공간적 증명

본 간찰의 서두인 "오랫동안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편지도 드리기 어려웠으니... 무슨 일로 이토록 연락이 끊기게 되었는지 안부를 여쭙니다"라는 문장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한국(조선) 땅을 떠나 오랜 세월 해외(중국)에 머물며 국내와의 통신이 완전히 차단되어 살았던 망명객의 실제 타임라인을 완벽하게 입증해 준다.

백범 선생이 고향 황해도를 떠나 중국에 체류하게 된 역사적 동선은 다음과 같다.


1895~1896년 (청년 시절 일시 체류):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에 격분하여 의병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자 의형제 김형진 지사와 함께 만주 선양 등지를 유랑한 후 귀국했다.

1919년 4월 (평생의 중국 대망명 시작): 3·1 운동 직후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황해도에서 홀로 탈출, 중국 상하이(상해)로 대망명을 단행했다. 이때부터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무려 26년간 단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에서만 체류했다.

만약 이 편지를 쓴 주체가 한국(조선) 내부에서 이동하던 인물이었다면 "오랫동안 소식이 완전히 끊겨 고향의 중대한 소송 결과를 몇 년 동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백범 선생이 수십 년간 중국 망명지라는 해외에 완전히 고립되어 살았기 때문에 고향 문중에서 일어난 민사 재판 결과를 들을 길이 없어 뒤늦게 편지로 애타게 물어본 정황이 공간적·역사적으로 확실히 증명되는 것이다.

4. 백범의 중국 망명 및 이동사 고증: 대여정의 타임라인

본 간찰의 서두에 등장하는 “오랫동안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편지도 드리기 어려웠으니…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는 고백은 백범 김구 선생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중국 망명 및 격리 유랑의 역사적 사실과 완벽하게 궤를 같이한다. 백범 선생의 중국 입중 역사는 크게 세 단계로 집약된다.

1차 중국 행 (1895~1896년):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에 격분한 청년 김구는 고향 황해도 해주의 평생 동지이자 의형제인 김형진(金亨鎭) 지사와 함께 참빗 장수로 위장하여 만주 선양 일대로 건너가 의병 활동을 위한 정세를 살피고 귀국했다.

2차 대망명 (1919년 4월): 3·1 운동 직후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황해도를 탈출하여 중국 상하이(상해)로 망명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1945년 환국할 때까지 26년간 단 한 번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하는 장기 격리가 시작되었다.

3차 중국 내 극비 유랑기 (1932~1934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를 탈출, 항저우, 가흥, 난징 등으로 사선을 넘나들며 극비리에 이동했다.

편지의 서두는 이처럼 수년간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및 가흥의 선상에 격리되어 국내 및 가문과의 통신이 완전히 두절될 수밖에 없었던 머나먼 타국(중국) 망명객의 특수한 처지를 완벽하게 입증하는 내부적 증거이다.

5. 윤봉길 의거 후 현상금과 가흥(자싱) 피난사 고증

본 간찰의 공간적 배경인 중국 절강성 가흥(자싱)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감행된 윤봉길 의사의 위대한 의거로부터 촉발된 역사의 현장이다.

의거 직후 일제 사법 당국은 배후 조종자인 백범 김구 선생에게 당시 총독부 예산의 거액에 해당하는 6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상하이 전체가 일본 군경과 밀정으로 도배되자 백범 선생은 중국 국민당의 주선과 가흥의 명망가 저보성(儲輔成)의 헌신적인 비호 아래 가흥으로 피신했다.

김구 선생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중국인 옷을 입고 ‘장진구(張震球)’라는 위장 가명을 사용하며 가흥 남호(南湖)의 선상과 해염의 재청별장에 은둔했다. 이 시기 백범 선생의 내면은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극도의 긴장감과, 나라 잃은 지도자의 고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 

6. 안공근·피화국의 황해 해주 가솔 탈출 작전 고증

본 간찰에서 “이 못난 아우는 지난 2월 초에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이르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임시정부 역사상 가장 눈물겨운 ‘가족 망명 탈출 작전’의 성공 기록이다.

1932년 이후 백범 선생이 중국 땅을 떠도는 동안 고향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 남아있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두 아들(김인, 김신)은 일제 경찰의 가혹한 감시와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에 백범 선생은 임시정부의 극비 행동대이자 첩보 총책인 안공근(안중근 의사의 친동생) 지사와 행동대원 피화국(皮華國) 지사를 국내(황해도)로 급파하는 특수 작전을 감행했다.

안공근과 피화국 지사는 목숨을 걸고 황해도 해주로 잠입하여 가족들을 접선한 뒤, 야반도주하듯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일제의 국경 검열을 뚫고 1934년 2월 12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934년 2월 13일(음력 1933년 섣달그믐날 밤), 백범 선생이 숨어 있던 가흥 남호의 칠흑 같은 배 위에서 연로하신 어머니와 두 아들이 눈물의 극적 상봉을 이뤄냈다.

작전 요원들이 가족들을 배 위로 인계해 주자, 비로소 가장이자 종손인 백범 선생이 주체가 되어(弟) 가족들을 직접 거느리고(率眷) 비밀 아지트로 이주시켜 피난 생활을 책임지기 시작한 시점(2월 초순)의 역사적 팩트와 부합한다.

7. 가문사·유교 예법적 고증 (1): 큰아버지의 무자(無子)와 종통(宗統) 승계

본 간찰에서 아우(김구)는 편지를 받는 대상을 ‘오형(吾兄: 형님)’이라 부르고 있다.  안동 김씨 양산파 족보와 백범의 가문 역사를 추적하면 놀라운 가문사적 진실이 밝혀진다.

백범의 아버님인 김순영(金淳永)씨는 사실 4남 1녀 중 ‘차남(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즉, 고향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 선영에는 백범의 큰아버지인 김백영(金百榮)씨와 작은아버지들 집안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자손인 백범의 ‘사촌 형님’, ‘당숙 형님’들이 고향 땅에 분명히 살고 있었으며, 편지를 받는 ‘오형’은 바로 문중의 사촌 형님을 뜻한다.

그렇다면 차남의 자식인 김구가 왜 가문의 전면에 나서서 조상의 묘소를 걱정하는가? 여기에는 ‘큰아버지의 무자(無子)와 요절’이라는 유교 가문 특유의 종통 승계 법칙이 숨어 있다.

가문의 장남이자 장손이었던 큰아버지 김백영씨는 아들(후사)을 두지 못하고 1880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조선 시대 유교 법도에 따르면 큰집에 아들이 없으면 둘째 집(차남)의 라인으로 가문의 메인 종통과 제사권이 강제 이동하게 된다.

이에 따라 차남이었던 백범의 아버님이 큰집의 종손 지위를 그대로 승계받았고, 그 아버님의 유일한 외동아들이 바로 백범 김구였기 때문에, 백범은 태어날 때는 차남의 자식이었으나 실제 가문의 계보상으로는 제사와 종통을 독점 책임져야 하는 ‘사실상의 최종 종손이자 독자’가 된 것이다. 

8. 가문사·유교 예법적 고증 (2): 종손의 4대 봉사 의무와 ‘사위선묘(四位先墓)’

가문사적 고증은 본 간찰의 가장 핵심 구절인 ‘사위선묘(四位先墓)’와 결합했을 때 완벽한 법학적·제례학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본문에서 백범은 고향의 형님에게 "제 네 분의 조상 무덤(四位先墓)을 모두 형님께서 아래로 굽어살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왜 하필 다른 일가친척들이 많음에도 '네 분(4위)'의 묘소만 콕 집어 독자이자 종손인 김구 가문의 몫으로 남겨두었을까?

유교 예법의 기준인 《주자가례》에 따르면, 가문의 정통 종손은 ‘4대 봉사(四代奉祀)’라 하여 자신의 직계 선대 4대[부친(김순영) - 조부(김만묵) - 증조부(김영원) - 고조부(김대충)]의 제사와 무덤을 다른 방계 친척들과 분리하여 독점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신성한 법적 의무가 있었다. 작은집 친척(사촌 형님 등)들은 가문의 공동 선산 벌초는 함께 할 수 있어도, 이 종가 메인 직계 라인의 4대 조상 묘소(사위선묘)를 대신 책임져 줄 제례적 권한과 의무가 없었다.

1934년 2월 초, 일제의 극심한 감시를 뚫고 안공근·피화국 지사의 도움으로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두 아들마저 중국 가흥으로 망명시켰다. 이 순간, 황해도 고향 땅에는 종손인 김구 선생 본인이 목숨을 걸고 전담해야 하는 직계 조상 4대의 무덤(사위선묘)을 돌볼 직계 혈육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된 미증유의 가문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큰집은 아들이 없고, 작은집 친척들은 김구의 독립운동 연좌제에 걸려 일제 고등경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가산이 탕진되어 선산을 정상적으로 돌볼 여력이 아예 없었다.

이에 종손으로서 조상의 무덤을 황폐하게 버려두고 타국으로 도망쳤다는 처절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백범 선생은, 고향 문중에서 일제의 감시를 조금 비껴나 살아가던 사촌 형님(오형)에게 극비 무명 서한을 보내 "장손 집안이 무효가 되고 내 친가족이 다 나왔으니, 오직 종손인 나만이 전담해야 하는 내 직계 조상 네 분의 무덤(四位先墓)만큼은 형님이 나를 대신해 부디 특별히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종손으로서의 피눈물 나는 유언적 탁송을 올린 것이다. '사위선묘'라는 단어는 백범 가문의 족보 기록 및 4대 봉사 예법과 자로 잰 듯 정확히 일치하는 결정적 물증이다.

9. 기후학적·사회학적 고증 (1): 1934년(소화 9년) 구오월(舊五月) 대가뭄의 조선 삼남 지방 기후 연동

본 간찰에서 날짜는 ‘舊五月 念日(음력 5월 20일)’로 명시되어 있다. 이 시점을 양력으로 정밀 변환하면 ‘1934년 7월 1일’이 된다. 1934년 2월 13일 가족들이 중국 가흥 남호 선상에 도착해 상봉한 지 약 4개월이 지나 피난 생활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을 시점이다.

본문에는 "謹不審毒旱 (삼가 이 모진 가뭄 속에서 형님의 일상이 편안하신지 살피지 못했습니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기상청의 역사적 기후 데이터 및 1934년 6월 말~7월 초 《동아일보》 사설 보도를 추적하면 놀라운 기후학적 사실이 드러난다. 1934년 초여름은 한반도 남부 지방(삼남 지방)에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아 모내기율이 50%를 밑돌고 심은 모가 전부 타 죽어 가던 ‘조선 역사상 최악의 대가뭄(한발)’의 정점기였다. 전국 각 마을마다 하늘을 원망하며 기우제를 지내던 고통의 극치 시기였다.

당시 중국 가명(장진구)을 쓰고 해외(중국 가흥 은신처)에 철저히 격리되어 있던 백범 선생은, 눈앞에 닥친 타국의 기후 속에서도 고향 조선 땅에 몰아친 이 모진 대가뭄(毒旱) 소식을 상해의 언론이나 정보망을 통해 접하고,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을 고향의 사촌 형님 가문의 안위를 극도로 걱정하며 "이 모진 가뭄 속에서 형님의 몸이 비단처럼 편안하신지 살피지 못했다"고 안부를 물은 것이다. 양력 7월 1일이라는 정확한 가뭄 최절정기의 타임라인 연동은 본 간찰이 1934년의 역사적 현장에서 호흡하며 쓰인 진품임을 기후학적으로 완벽히 선포한다.

10. 기후학적·사회학적 고증 (2): 1930년 대공황 이후 장기화된 문중 민사 소송(訴訟事)의 실증

본문 중 또 다른 핵심 구절이 바로 "大抵年前訴訟事 何以結末耶 (대저 몇 년 전에 있었던 그 소송 사건은 어떻게 결말이 났습니까?)"라는 질문이다. 독립지사들이 일제 법정에서 싸우던 사상 투쟁은 사법적으로 '형사 재판' 혹은 '공판'이라 부른다. 반면 본문의 ‘소송(訴訟)’은 개인 간의 재산권이나 토지, 무덤 자리를 다투는 민사적 분쟁을 뜻하는 고유 어휘이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의 사법 기록을 정밀 고증하면, 1929년 말 발생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1930년부터 조선 땅을 정통으로 타격하면서, 전국의 지방 양반 가문들 사이에 빚독촉(채권·채무) 소송과 토지 소유권 민사 재판이 폭발적으로 급증했다.

특히 일제가 토지와 임야의 경계를 근대식 법조문으로 재편하던 과정에서, 조선의 수많은 문중들이 조상의 무덤 자리를 두고 "우리 땅이니 묘를 파내라"며 다투는 ‘무덤 소송(산송, 山訟)’이 1930년부터 전국 법원에 산더미처럼 쌓여 한 번 시작되면 3~4년씩 재판이 끝나지 않고 질질 끌리는 장기화 상태가 지속되었다.

해외에 망명해 있던 백범 선생으로서는 1930년부터 고향 황해도에서 가문의 재산이나 선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일제 및 타인과 외롭게 치러내던 사촌 형님(오형)의 그 ‘일반 사적 소송 사건’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해결(결말)되었는지 격리되어 알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가족들을 자싱에 안착시킨 후 4개월이 지난 1934년 7월 1일(구오월 염일), 고향의 형님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제가 국내에 없어서 소식을 몰라 묻습니다. 1930년부터 형님이 가문을 위해 매달려 계시던 그 지긋지긋한 소송 사건은 결국 작년에 어떻게 결말이 났습니까?"라고 물어본 정황이 사회학적으로 완벽한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11. 언어사학적 고증 (1): 《백범일지》 친필본 수록 단어(생활·세계·결함·죄송·솔권 등)와의 완벽한 일치성

본 간찰의 어휘 체계를 분석해보면, 시중의 눈먼 이들의 주장과 달리 백범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 친필본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식 사료를 저술할 때 사용했던 고유의 근대식 한자 어휘 습관이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영혼처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범 선생은 전통 한학을 닦았으나 개화기 신문물과 신어를 적극 수용한 지식인이었다.

[《백범일지》 친필본과의 정밀 단어 대조 증명법]

生活 (생활)  간찰 속 "생활지난(生活之難)"

《백범일지》 친필 기록: 상하이 시절의 극심한 경제적 곤궁을 다룬 대목에서 '생활난(生活難)', '피난생활', '공동생활' 등의 명사 형태로 자서전 전반에 걸쳐 수십 번 단골로 직접 구사하셨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정착된 근대 한자어인 ‘생활’의 사용은 본 간찰이 일제강점기 1930년대의 언어 지도를 정확히 따르고 있음을 증명한다.


世界 (세계)  간찰 속 "缺陷世界(결함세계)"

《백범일지》 친필 기록: 마곡사 입승 시절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라고 독백하는 대목 및 〈나의 소원〉 장의 '세계 평화', '문화 세계' 등 백범이 일생 동안 가장 즐겨 쓰던 상징적 중심 어휘이다.


缺陷 (결함)  간찰 속 "缺陷世界(결함세계)"

《백범일지》 친필 기록: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의 조직적 한계와 법제상 미비점을 날카롭게 자아비판하는 회고 대목에서 "과론적으로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라며 직접 친필 붓글씨로 이 단어를 기술하셨다.


罪悚 (죄송)  간찰 속 "罪悚難容(죄송난용)"

《백범일지》 친필 기록: 인천감옥 탈옥 후 자식 때문에 일제 경찰에게 고초를 겪으신 부모님을 평양 영천암에서 극적으로 대면하여 눈물을 흘리는 회고 장면에서 "부모님께 죄송합니다(罪悚합니다)"라고 명확하게 이 한자를 구사하셨다.


率眷 (솔권)  간찰 속 "二月初率眷轉到(2월 초에 가족을 거느리고 이주함)"

임정 공식 사료 기록: "가족을 동반하여 망명 및 피난하다"라는 뜻의 임시정부 고유의 첩보·이동 관용구로, 동지들의 가솔 이동을 기록한 문서 곳곳에 "솔권이주(率眷移住)하다가..."의 형태로 고스란히 박혀 있다. 안공근과 피화국 지사가 황해도에서 탈출시켜 준 가족들을 마침내 인도받아 자기 손으로 책임지고 거느리기 시작(率眷)한 가장 백범의 상황과 완벽히 맞아떨어진다.


訴訟 (소송)  간찰 속 "大抵年前訴訟事" (대저 몇 년 전의 소송 사건)

《백범일지》 친필 원문 용례: 백범 선생은 청년 시절 양반과 토호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던 기록, 그리고 1910년대 인천감옥에 갇혀 있을 때 억울한 죄수들을 위해 대신 재판 서류를 작성해 주던 법정 투쟁 일화를 회고할 때 이 단어를 직접 붓으로 구사하셨다.

예시 (백범일지 상권): “포악한 양반들이 민간의 재산을 빼앗으려 하매 내가 그를 위해 법가에 訴訟을 提起하여…” 혹은 “감옥 안의 죄수들이 한문을 몰라 재판관에게 소장을 쓰지 못하거늘 내가 대필하여 주니 訴訟마다 결말이 좋았다.”

고증 분석: 이처럼 백범 선생은 사상 투쟁(형사 재판) 외에도 일반 백성이나 가문의 사적인 재산 분쟁을 다룰 때 관습적으로 ‘訴訟(소송)’이라는 고유한 근대 사법 용어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사용했다.


客地 ( 간찰 속 "客地人事何以方向耶(객지의 인간사가 어찌 방향이 있겠는가)"

《백범일지》 친필 기록 및 구체적 예시:

평생을 고향 황해도를 떠나 만주, 상하이, 항저우, 가흥, 난징, 충칭 등 중국 전역을 망명객으로 떠돌았던 백범 선생에게 타향은 늘 고독하고 고달픈 '객지'였습니다. 《백범일지》 상권과 하권 전체에서 타국에서의 고난을 회고할 때 이 어휘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나의 망명 생활은 늘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도는 고달픈 객지(客地)의 연속이었으며..."

고향 땅을 떠나 낯선 중국 가흥의 선상과 비밀 별장을 전전하며 하루하루의 안위를 걱정하던 백범의 처지가 이 '객지'라는 단어 속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舊 / 舊五月 (구 / 구오월)  간찰 속 "舊五월 念일"

《백범일지》 친필 기록 및 구체적 예시:

백범 김구 선생은 평생 음력 절기와 전통 달력에 맞춰 생활하셨던 분으로, 원고를 집필할 때 현대적인 '음력'이라는 단어 대신 철저하게 예전 달력이라는 뜻의 '舊(구)' 또는 '舊曆(구력)'이라는 표기를 고수하셨습니다. 실제 《백범일지》 상권 서두 본인의 탄생일을 기록한 친필 원고를 보면 정확히 이 습관이 증명된다.

"나는 국조 기원 4209년 병자(丙子) 구력(舊曆) 7월 11일 자시(子時)에... 태어났다."

간찰 말미의 ‘舊五月’은 본인의 탄생일을 적을 때 썼던 ‘구력’ 표기 습관과 정확히 일치하는 백범 고유의 서제(書題) 양식이다.

이처럼 본문을 구성하는 모든 핵심 단어들이 《백범일지》의 공식 기록과 단 한 자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일치하며 1934년 당시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백범 김구 선생이 구사하던 특유의 근대식 한자 지식과 언어적 영혼이 본문 속에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12. 언어사학적 고증 (2) (촉도지난·일반 간찰에서 볼 수 없는 舊五月 간찰 말미 표기)

촉도지난(蜀道之難) 비유의 고독성: 본문의 "弟之生活之難 難於蜀道之難 (아우의 생활의 어려움은 촉나라 길을 가기보다 더 어렵다)"라는 대목은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촉도난》을 인용한 서간 관용구이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60만 원의 현상금 속에서 사방에 밀정이 깔리고 동지들이 변절하며, 임시정부 내부에서 파벌 분쟁으로 결함(缺陷)이 가득 차 서로를 불신하던 자싱 피난 시절, 나라 잃은 독립운동가로서 겪어야 했던 뼈를 깎는 고독과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던 생활고가 이 '촉도지난'이라는 한 줄의 비유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② 특히 본 간찰 말미의 ‘舊五月이라는 날짜 표기 방식 : 이는 고문서학적으로 대단히 주목해야 할 결정적 증거이다. 조선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만 점의 간찰을 조사해 보아도 날짜 앞에 옛 구(舊) 자를 단독으로 붙여 표기한 사례는 시중의 일반적인 선비들의 편지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극히 이례적인 형태이다. 이는 일제의 연호(소화) 사용을 철저히 거부하면서도 삼엄한 우편 검열 속에서 임정 연호를 숨겨야 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자신의 평소 언어 습관인 '구력(舊曆)' 표기 관습(《백범일지》 친필본의 '舊曆 7월 11일' 표기 등)에 따라 발신 날짜를 ‘舊五月’로 극비 축약 표기한 백범 고유의 독립운동가적 지문(指紋)이다.

13. 첩보사적 필연성 고증: 백범 김구 선생의 사설 한문 간찰이 국내에 단 한 장도 잔존하지 못했던 이유

마지막 의문은 "백범 김구 선생이 평생 보낸 수많은 편지가 있을 텐데, 왜 지금까지 국내 지인에게 보낸 사설 비밀 간찰은 한 점도 보고된 바 없으며 이 유물이 독보적이고 유일한가"라는 점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첩보전의 참혹한 역사를 보면 완벽하게 필연적인 역사적 비극이다.

첫째,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하기 위한 즉시 소각(焚書)의 규칙:

당시 국내에서 백범 김구가 보낸 편지를 소지하고 있다가 일제 고등경찰이나 밀정에게 적발되는 순간, 그 사람은 물론 일가친척 전체가 독립운동 자금 내통 및 국가보안법(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따라서 편지를 받은 국내의 지인이나 친척들은 눈물로 내용을 읽은 후, 가문의 생존을 위해 그 자리에서 즉시 불태워 흔적을 없애는 것이 철저한 보안 수칙이었다. 보관하는 것 자체가 가문 전체의 목숨을 담보로 한 행위였기에 사설 간찰은 태생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둘째, 6·25 전쟁과 북한 지역(황해 해주)이라는 공간적 분단의 비극:

본 간찰의 수취인은 백범 선생의 조상 묘소(사위선묘)가 있던 황해도 해주 고향 땅의 사촌 형님(문중 가문)이다. 해방 전까지 이 편지를 기적적으로 벽장 속에 숨겨 보관해 왔더라도, 해방 후 황해도는 북한 땅이 되었다.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며 북한 지역의 수많은 종가댁 고문서들이 폭격으로 전수 불타 없어졌다.

14. 결언 (結言)

종합하건대, 본 간찰은 표면적인 묵색의 차이와 필체의 유려함이라는 겉모습의 함정에 빠져 일차원적인 위작의 누명을 쓰기 쉬운 유물이었으나, 소장자의 철저한 학술적 검증을 통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1934년 2월 초 백범 선생 가족의 가흥 비밀 탈출 및 상봉 직후의 피를 말리는 역사적 실상을 담고 있다.

역사적 인과관계의 완성: 1919년 상하이 대망명 이후 26년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던 백범 선생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최고 현상금이 걸려 중국 가흥으로 피난하였다.  1934년 2월 13일 안공근·피화국 지사의 목숨 건 현장 호송으로 연로하신 어머니와 두 아들을 극적으로 상봉하였다.  4개월간 가흥 비밀 아지트(재청별장)에 안착시켜 본인이 주체가 되어 가족 피난 생활을 총괄(率眷)하였다.

내용의 필연성: 오랫동안 해외 망명객으로 고립되어 있어 고향 소식을 전하지 못했음을 미안해하며, 자신이 큰아버님 가문의 무후로 인해 큰집을 승계한 외아들이자 독자 종손이기에, 온 가족이 탈출하여 고향에 홀로 버려지게 된 직계 조상 4대의 무덤(四位先墓)을 사촌 형님에게 피눈물로 탁송하였다. 또한 1930년 대공황 이후 고향 문중에서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치르고 있던 장기 민사 소송 안부를 질문하고, 나라 잃은 망명객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곤궁함을 '촉도지난(蜀道之難)'에 비유하여 처절하게 탄식하였다. 그리고 일반 간찰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舊五月’ 날짜 표기를 한 관습이 《백범일지》 친필본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따라서 본 유물은 국내에 보고된 바 없는 "일제강점기 극비 은둔 시절, 백범 김구 선생이 국내 가문과 소통했던 유일무이하게 잔존하는 한문 친필 간찰 서한"임을 고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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