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품 크기 | 18×52.5센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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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조국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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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암 이부광의 서법첩인<춘종첩>
설암 친필 목판본/책판이 큽니다
당나라 시인 이신(李紳772~846)이 지은 아주 유명한 시,민농(憫農,농부를 가엾게 여기다)을 설암 이부광이 옮겨 쓴 서법첩
●마지막 페이지 간행기록
元貞二年深秋雪菴書 원정이년 심추설암서/ 1296년 늦가을에 설암이 쓰다
본 매물은 국가공인감정을 안받은 책입니다
따라서 간행기록, 1296년 원본인지 혹은 후대, 후쇄본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 설암 이부광은,
설암 이부광의 글씨는 고려 말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 시기에 원나라와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고려에 처음 들어왔다
한국과 중국의 서예사, 특히 대자(큰 글씨)와 현판(편액) 글씨 분야에서 설암 이부광의 위상은 독보적인 최정상급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서예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행서를 쓴 사람이 왕희지나 조맹부라면, 성문이나 궁궐 현판에 쓸 웅장하고 힘 있는 큰 글씨(대자해서)의 최고 권위자는 단연 설암 이부광이다.
1. 조선 왕실과 국가가 공인한 교과서
조선 초기, 나라의 공식 글씨를 담당하던 관청(승문원, 교서관 등)에서는 글씨를 배울 때 설암의 글씨체를 필수 교과서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이 직접 신하들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설암체(雪庵體)를 무척 숭상한다고 말한 기록이 나온다.
세조 때도 나라에서 반드시 수집하고 찍어내야 할 중요 법첩으로 왕희지, 조맹부의 글씨와 함께 설암의 법첩을 지정해 국가적으로 널리 보급했다.
2. 조선 최고의 명필 한석봉의 스승
한석봉(한호)의 웅장한 대자해서(큰 정자체)가 바로 이 설암 이부광의 서풍을 깊이 흡수하여 완성된 것이다.
왕희지의 글씨는 정밀하고 아름답지만, 멀리서 보아야 하는 커다란 현판이나 대자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석봉이 평생 모델로 삼고 강렬한 필세를 배운 대상이 설암이었다.
실제로 한석봉의 큰 글씨와 설암의 글씨를 비교해 보면 자형과 꺾임(파세)이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다.
3. 전국 명산대천, 사찰 현판의 뿌리
원나라의 학자 도종의는 설암에 대해 글씨와 그림이 신품(신의 경지)에 올랐다 라고 극찬했다.
그는 당나라의 안진경과 유공권의 묵직한 서법을 이어받아 뼈대가 굵고 속이 꽉 찬 글씨를 썼다.
이 때문에 고려 말 공민왕 때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궁궐의 현판, 성문, 전국의 유명한 사찰이나 서원의 웅장한 편액 글씨는 거의 대부분 설암체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예가들이 작은 글씨를 연습할 때는 왕희지나 조맹부를 찾았지만, 가문의 간판을 쓰거나, 웅장하고 호방한 기상을 표현하는 큰 글씨를 쓸 때는 무조건 설암 이부광을 가리켰다.
설암글씨는 조선 서예인들의 성경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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