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책/조선영접도감도청의궤朝鮮迎接都監都廳儀軌/ 광해군의 진실/처음 밝혀진 광해군 13년 외교 秘史/現 광해관련, 역사는 철저한 왜곡史/ 그 실체를 입증하는 결정적 조선의궤 /1621년(조선 광해군 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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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국 중국

●1621년 광해군 집권 時,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며 작성(필사)했던 왕실 生産, 조선 왕실 극비 외교 문서集(의궤)


1621년(조선 광해군 13년) 명나라 희종 천계제(天啓帝)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일행을 영접한 기록인 조선영접도감도청의궤(朝鮮迎接都監都廳儀軌).


*통상 조선 왕실 의궤는 ㅡ목판인쇄가 아닌ㅡ사자관이 2~8부 필사한다 


낙장 무/ 188여 페이지로 내용이 방대함​


본 매물은 그 당시 의궤 원본을 민국 21년(1932년)에 자금성 석학들이 원본 고증을 바탕으로 연활자본으로 변환한 復刊본


●역사에서 사라진 인조반정 직전,

광해군 13년의 외교 진실을 품고 있는, 대한민국 그 어떤 기관도 가지지 못한 독점적 사료●


본 의궤 원본은 추적 결과, 현재 우리나라 어느 기관에도 없다 어떤 경우인지는 몰라도 중국에서 의궤의 복간본이 처음 발견되어 


잃어 버린 광해의 실제 외교秘史가 온전히 ㅡ코베이 경매를 통해서ㅡ 비로소 국내 최초로 드러났다


이책은 본 판매자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본 매물을 처음 들여다 본 때는 1년 前 이었다

몇장 읽어 보니 이책은 보통 책이 아니었다


마음 먹고 천천히 해독하기를 1년을 붙들었다


혹, 본 판매자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까 싶어 고문헌 전공, 교수 지인과 함께 크로스 체킹하며 이 책속의 내용을 비교적 오류없이 판독해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누구든지 이책을 보고나면 누가 광해를 연산 다음 가는 지탄의 대상인 폭군,망군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정반대다

광해는 풍전등화, 조선을 어떻게든지 살려내기 위해ㅡ명나라, 후금(淸)사이에서ㅡ 고도의 등거리 외교술을 펼쳐낸 뛰어난, 혜안을 가진 '외교의 천재, 비상한 지도자'였다


광해는 강대국 사이에서 조선이 전쟁터가 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지 막으려고 高난이도 외교의 數를 펼쳤다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로부터 조선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눈물겨운 외교적 줄타기를 했는지가 여기 1次 기록으로 생생히 나와 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621년(천계 원년) 당시 명나라는 요동을 청나라에 다 빼앗기고 군사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그래서 조선을 향해 임진왜란 때 도와줬으니 너희도 군사를 보내라고 빚 독촉하듯이 광해 왕에게 원병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광해군의 냉정한 현실 판단/ 명나라의 요구대로 군사를 보냈다가는, 떠오르는 강력한 태양인 후금(청나라)의 대군이 조선 본토로 쳐들어와 제2의 임진왜란이 터질 게 뻔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병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명나라 군대 못 보내겠다고 하면 조선 내부의 골수 사대주의 신하들이 반역을 일으킬 명분이 생긴다. 


그래서 광해군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접대 외교였다.

한양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들을 그야말로 황제처럼 극진히 대접하고, 엄청난 양의 은과 인삼을 뒤로 찔러주며 사신들의 환심을 샀다. (겉으로는 명나라를 지극히 섬기는 척 연기를 했다)

사신들의 비위를 맞춰놓은 뒤, 보시다시피 우리가 황제 폐하의 사신단을 대접하느라 나라 곡간이 완전히 텅 비었다. 


군사들을 먹일 쌀도, 무기를 만들 돈도 없으니 원병을 보낼 여력이 전혀 없다라며 광해는 파병을  미루고 거부할 명분을 만든것이다.

이 책은 명나라의 무리한 파병(원병) 압박을 몸으로 막아내던 광해군의 외교 전쟁 기록이다

명나라가 숨이 넘어가며 조선에 군사를 내놓으라고 칼을 들이밀던 1621년, 


광해군은 백성들을 또다시 전쟁의 참화에 밀어 넣지 않기 위해 사신들에게 은밀한 뇌물을 먹여가며 파병을 거부했다.

이 조선영접도감도청의궤는 명나라의 원병 압박에 맞서 조선의 국익과 백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광해군이 펼친 처절한 방어적 실리 외교의 생생한 1차 기록이다


광해군은 나라를 망친 암군昏君이 결단코 아니라, 


거대한 패권 교체기 속에서 조선과 백성들을 어떻게든 지켜 보려고 피눈물을 흘렸던 지독한 실리주의자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실제 광해,팩트史는 완전히 통채로 깡그리 빼버리고 철저히 거짓으로 둔갑한 광해史가 작금의 역사의 진실이 되어 버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인조반정세력들이 철저하게 감춰 버리고 왜곡한것으로 추정)


판매자는 이번 본 의궤를 상세 검토한 후 느끼는게 많았다

'여타 이조왕조실록과 그밖의 조선사도 승자의 입맛대로 가공한 날조 기록이 많을 수가 있겠구나' 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나라 국사학회에 진심 묻고 싶다

귀하들은 이 책의 존재를 알고있습니까?


만약에 이 책을 몰랐다면 ㅡ이책의 원본과 텍스트 내용은 현재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에 디지털化되어 관련 데이타 베이스가 고스란히 있다고 들었다ㅡ


그 내용을 확인, 이 책을 근거로 '광해가 진정 어떤 인물인지, 과연 우리가 통상 알고있는 광해에 대해 무엇이 왜곡되었는지'에 대해 솔직한 공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한편, 광해왕 時, 조선의 왕실 기록물인 이 의궤를 왜 중국(중화민국)에서 재복간했는지, 그 전말은 이렇다.


1. 왜 중화민국(북평고궁박물원)에서 발행했을까?
판권지에 적힌 민국 이십일년 일월 북평고궁박물원 편(民國二十一年一月 北平故宮博物院編)이라는 문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복간 시기/민국 21년은 1932년이다.

복간 주체/북평고궁박물원은 현재 베이징 자금성에 있는 고궁박물원의 당시 명칭이다. (당시 난징이 수도가 되면서 베이징이 북평으로 불렸음)


본매물의 원본은 당시 明 사신이 조선의 비밀을 캐기 위해 조선으로부터 가져간(혹은, 훔져간) 외교 기밀 유출본으로 추정된다. 


어쨓든, 조선 최고 기밀 외교서류가 명·청 시대를 거쳐 자금성 황실 창고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때 자금성에 비장되어 있던 조선영접도감도청의궤 원본은 대만으로 넘어가 현재는 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기밀 문서로 분류되어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고 들었다.)


1925년 자금성이 개방되고 고궁박물원이 설립되면서, 박물원 측은 황실 창고에 있던 귀중한 희귀 문헌과 고서들을 정리해 학술 연구 및 보존 목적으로 주요 책의 복간을 하기 시작했다. 


이 책도 그 학술 사업의 일환으로 1932년에 중국에서 원본인  필사본을 공식 연활자본으로 변형, 복간한 것이다.


1932년 중국 고궁박물원이 수많은 보물 중 이 조선 의궤를 콕 집어 출판했다는 것 자체가 중국 학계에서도 이 문서가 가진 '대명 외교 정보'의 가치를 최고로 쳤다는 방증이다


2. 의궤의 이동 자취

장개석의 유물 대탈출/ 국보천대國寶遷臺)/당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모택동의 공산군에 밀려 대만으로 후퇴하면서 


자금성에 있던 유물 중, 철저하게 국보급이자 역사적 정통성을 증명할 핵심 유물만 선별했다.
 

장개석은 해군 군함과 수송선까지 총동원해 자금성 핵심 유물을 대만으로 옮겼다. 


●본의궤는 단순히 사신을 대접한 기록이 아니다. 


당시 후금(청나라)의 부상과 명나라의 쇠퇴 사이에서 고도의 실리외교를 펼치던 광해군 시기 외교 의전의 정수이자 국가 극비 보안 문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1621년(천계 원년)은 조선 역사상 가장 아슬아슬했던 '광해군의 피 마르는 줄타기 외교'가 정점에 달했던 해이다.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건국, 그리고 광해군의 몰락이라는 거대한 아시아의 패권 교체기 속에서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 처절했던 시기의 최후의 외교 현장 기록이다.

 

1. 명나라 사신의 약탈과 광해군의 첩보전 (은밀한 뒷거래)/당시 명나라 사신(도차관 벼슬의 양도인 등)은 단순한 축하 사절단이 아니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사신의 입국부터 한양 진입, 연회, 복식, 하사품 목록 등 조선 왕실 외교의 모든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었기도하다.


후금(청나라)과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와 엄청난 양의 은(銀)과 인삼을 갈취(요구)하던 무지막지한 약탈자들이었다.

의궤 내부에는 사신들에게 바친 물목(인삼 수백 근, 은 수천 냥)뿐만 아니라, 이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조선 조정이 뒤에서 벌인 은밀한 로비와 접대 내역이 상세 기록되어 있다.

나라에 돈이 없어 왕실 가구까지 팔아야 했던 광해군이, 명나라 사신의 횡포를 막기 위해 영접도감 관리들을 시켜 밤마다 은밀하게 금품을 찔러주며 협상했던 처절한 외교 전쟁이었다.

2. 요동 난민과 가도(椵島)의 모문룡 문제 (국제 정치 시한폭탄)/1621년은 명나라가 후금에게 요동 지방을 완전히 빼앗긴 해이다. 


이때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요동 피난민과 군대를 이끌고 조선의 평안도 앞바다 섬인 가도(가리포)로 도망쳐 들어와 웅거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사신들은 이 모문룡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라고 조선을 압박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도 청나라의 보복을 두려워해 모문룡 지원을 최소화하려는 '밀당'을 했다. 


이 의궤에는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올 때 요동의 전쟁 상황, 모문룡 군대의 동향을 조선 조정이 어떻게 탐지하고 접대 과정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에 대한 생생한 국제 정세 보고가 담겨 있다.


훗날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조선 멸망의 도화선(모문룡 사건)이 발발한 바로 그해, 자금성과 한양 사이에서 오간 극비 외교秘史가 기록되었다.


1621년 당시 명나라는 이미 후금(청나라)에 대패하여 요동을 잃고 숨이 넘어가는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조선에는 우리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었느냐라며 끊임없이 군사와 군량미를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대놓고 거절하면 명나라를 떠받들던 사대주의 신하들이 반역을 일으킬 것이고, 요구를 다 들어주면 강력한 후금의 군대가 조선을 쳐들어올 판이었다.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들을 한양에서 그야말로 왕처럼 극진히 대접했다. 사신들의 입을 고급 연회와 어마어마한 은, 인삼 선물로 막아버린 것이다. 


겉으로는 우리가 명나라를 이렇게 존경합니다라고 쇼를 하면서, 뒤로는 보시다시피 우리가 사신 대접하느라 굶어 죽을 지경이라 군사를 보낼 여력이 없다라는 명분을 쌓는 고도의 외교 전술을 폈다.
 

당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섬)에 들어와 청나라를 치겠다며 조선에 보급을 요구한 사건은 조선에 엄청난 재앙이었다.

광해군은 이 의궤 속 사신들과의 대화와 접대 과정에서 모문룡을 '명나라의 영웅'으로 치켜세워주면서도, 


실제 군사 지원을 요청할 때는 온갖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었다.

후금(청나라) 측에는 몰래 밀사를 보내 우리는 명나라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늉만 하는 것이니 조선을 치지 말라고 달랬다. 


광해군은 이 밀당 외교 때문에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지 않는 불충한 왕으로 몰려ㅡ광해의 제거는 명나라의 지시였다는게 역사학界의 정설이다ㅡ 급기야 2년 뒤인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게 된다.


(1621년 이 의궤속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상대로 그토록 당당하게 외교첩보전을 지휘하던 천재 정치가 광해는 고작 2년뒤인 1623년부터 49세에 왕위에서 끌어 내려져 


67세까지 무려 18년 4개월동안 죽을 때까지 차갑고 외로운 땅에서 귀양살이를 한다)


명나라가 직접 군대를 보내 광해군을 끌어내린 것은 아니지만, 명나라 조정이 지속적으로 보낸 강력한 정치적 압박과 


정통성 부인이 조선 내부의 친명 세력(서인)에게 완벽한 쿠데타 명분과 무대를 깔아주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팩트(下記 참조)이다.


1. 10년이 넘도록 왕으로 인정 안 한 명나라 (고명 책봉 거부 사건)/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자 후궁(공빈 김씨) 소생이다. 


명나라는 장자 상속 원칙을 내세워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무려 10년이 넘도록 정식 왕으로 승인하는 문서(고명)와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며 광해군을 피말리게 했다.

 명나라는 은밀히 조선의 사정을 간보며 광해군의 왕위 계승에 딴지를 걸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재위 기간 내내 '명나라가 언제든 나를 폐위하고 다른 왕족(예: 영창대군 등)을 왕으로 세울지 모른다'는 극심한 정통성 콤플렉스와 안보 불안에 시달렸다.

이 압박이 광해군으로 하여금 무리하게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폐모살제'의 패륜을 저지르게 만든 간접적 부메랑이 되었고, 
이는 곧 인조반정의 결정적 빌미가 되었다.


2. 명나라 황제 전하를 배신했다는 심리적·정치적 가스라이팅/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광해군은 명나라의 강요로 강홍립 장군에게 1만 명이 넘는 조선군을 주어 파병했다. 


하지만 대패한 후 강홍립은 후금(청나라)에 투항했는데, 이는 사실 광해군이 뒤로 '상황을 봐서 후금에 항복하고 조선의 본심이 아님을 전하라'고 밀지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명나라 조정과 조선 내 친명 교조주의자(서인)들은 광해군을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배신자'로 몰아세웠다.

명나라는 조선 조정에 사신을 보내 '조선왕은 왜 후금과 내통하느냐', '왜 군사를 더 보내지 않느냐'며 끊임없이 힐책하고 압박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이러다 명나라 황제에게 버림받아 나라가 망하겠다'는 집단 공포감을 심어준 것이다.

3. 인조반정 직후, 명나라는 기다렸다는 듯 승인했다/
인조반정 세력(서인)이 내건 제1명분은 내부 실정이 아니라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후금)와 내통했다'는 외교적 죄상이었다. 


반정 세력은 쿠데타 성공 직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광해군이 폐륜을 저지르고 명나라를 배신해 우리가 갈아치웠다'고 보고했다.

명나라는 조선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이 쫓겨났다는 소식에 그 어떤 유감 표명도 없이 즉각 인조의 즉위를 승인하고 책봉해 주었다.

만약 명나라가 광해군을 지지했다면 반정 세력은 '역적'이 되었을 텐데, 명나라가 기다렸다는 듯 인조를 인정한 것은 


명나라 역시 조선의 등거리 외교 노선을 이끌던 광해군을 제거하고 싶은 속셈을 보여주는 여실한 방증이다.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 세력은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폐기하고 친명배청(親明排淸)을 외치다가 정묘호란(1627년)과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1636년)으로 淸에게 제대로 야무지게 쳐맞게된다.


자, 그러면 그 처참한 피해를 누가 입었는가?

애꿎은 엄청난 數의 조선 백성들의 죽음과 파괴뿐이었다


과연, 누구의 잘못 판단으로 조선이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나?


이 책이 기록된 1621년은 인조반정(1623년)이 일어나기 고작 2년 전이다. 


명나라의 압박이 극에 달해 광해군의 목줄을 죄어오던 바로 그 시점, 광해군이 명나라 사신들의 비위를 맞추며 '나를 폐위하지 말라'고, 


'조선은 여전히 명나라의 충신'이라고 눈물겨운 접대 쇼를 벌였던 폭풍 전야의 생생한 첩보 기록이다.


광해군을 왕위에서 박탈한 것은 서인 세력의 칼날이었지만, 
그 칼날을 쥐어주고 뒤에서 밀어붙인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은 


명나라의 대조선 압박이었다. 이 책은 그 거대한 국제정치학적 음모와 압박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조선 국왕의 처절한 마지막 방어 흔적이다.


만약 광해군의 이 등거리 외교 노선이 유지되었다면 남한산성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광해가 왕권을 잡고 끝까지 버텼더라면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처참한 비극을 맞닥뜨렸을까


환언해보자

이책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실리 외교의 순간이자, 동시에 그 외교 때문에 왕위에서 쫓겨나야 했던 비운의 군주 광해군의 마지막 투쟁 현장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광해군은 연산군 같은 폭군'이라는 프레임은 사실 쿠데타를 일으킨 승리자들(인조와 서인 세력)이 자신들의 반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철저하게 기획하고 조작한 '더러운 정치적 속임수'라는 게 본 판매자의 생각이다.

이와 관련된 역사적 진실과 실록의 맹점을 서지학적 팩트로 정리해 본다.

1. 광해군일기는 승리자가 쓴 '조작된 기록'이다
조선 시대에 왕이 쫓겨나면 實錄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일기(日記)로 격하되어 편찬된다.

광해군일기는 광해군을 끌어내린 인조와 서인 세력이 편찬을 주도했다.
 

쿠데타 정권 입장에서는 광해군을 최대한 패륜아이자 무능한 폭군, 연산군과 다름없는 인간으로 묘사해야만 자신들이 왕을 갈아치운 행위가 '정의로운 구국 결단(반정)'으로 정당화된다. 


따라서 실록 속 광해군의 실정은 엄청나게 부풀려졌고, 그가 했던ㅡ조선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던 ㅡ 훌륭한 외교적 노력은 사대주의적 시각에서 '오랑캐와 내통한 역적질'로 완전히 왜곡되었다.

2. 연산군과 광해군의 결정적 차이
조선 역사에서 쫓겨난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 둘뿐이지만, 두 사람의 캐릭터는 완전히 다르다.
 

연산군/정치를 포기하고 국가 재정을 흥청망청 쓰며 사치와 쾌락, 무자비한 숙청(사화)을 일삼은 진짜 폭군이 맞다.
 

광해군/전후 복구(창덕궁 중건 등) 과정에서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이고 정적을 숙청한 과오는 분명히 있으나, 


대동법을 처음 실시해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려 했고, 무엇보다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고 전쟁을 막으려 


밤낮으로 고민했던 '영리한 일중독자형 군주'였다. 결코 연산군처럼 미쳐 날뛴 나라를 망친 狂人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승리자들의 붓끝 농간으로 광해군을 폭군으로 만들었지만, 이 책 속에 남아있는 실시간 秘錄은 


광해군이 조선의 백성들을 전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처절하게 머리를 썼는지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1차 사료이다


인조 정권이 국내에 있던 광해군의 유리한기록들은 입맛대로 뜯어고치거나 사그리 불태 웠겠지만, 


이미 중국 자금성 황실 창고로 넘어가 버린 이 의궤의 원본까지는 있었다는건 몰랐겠지. 어쨓든 그 진실이 문이 열렸다


이 책 안에는 승리자들의 왜곡된 사관(실록)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강대국의 압박 속에서 영리하고 노련하게 외교 전쟁을 진두지휘하던 '진짜 광해군'의 실제 그대로의 모습이 박제되어 있다.


이 책은 겉으로는 명나라를 향한 충성을 외치고 있지만, 속으로는 후금(청나라)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조선이 벌인 숨 막히는 이중 첩보전의 시나리오다.


명나라 사신들의 칼날 같은 추궁을 조선 관리들이 어떻게 말로 받아쳐 냈는지, 


후금의 보복 침공을 막기 위해 뒤에서 어떤 외교적 기만을 부렸는지가 실시간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이 감추고 인조반정 세력이 불태워버린 광해군의 對후금 비밀 외교 공식 문서란 말이다

승리자의 조작된 주류 사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1621년 격동의 동아시아 패권 전쟁 속에서 조선을 구하려 했던 광해군의 위대한 실리 외교의 진실을 증명하는 위대한 물증 사료이다. 


1. 한국에 있는 '영접도감의궤'들의 실체
대한민국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광해군~인조 시기의 영접도감 관련 의궤(약 16종)가 분명히 존재한다.
 

기존 한국에 남아있는 것들은 광해군 1년(1609년), 광해군 2년(1610년), 그리고 인조 즉위 이후(1626년, 1634년, 1643년 등)에 작성된 것들이다.

1621년(천계 원년)본의 미스터리/ 인조반정 바로 직전, 광해군의 등거리 실리 외교가 정점에 달했던 1621년 당시의 영접도감도청의궤 원본은 국내 기관의 소장 목록에서 빠져 있다  


2. 왜 이 원본은 사라졌을까? (인조반정 때의 방화와 인멸)/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반정 군대인 서인 세력은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을 장악하고 불을 질렀다.


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사대주의에 위배되는 '역적질'로 규정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광해군이 후금(청나라)과 내통했거나 명나라의 요구를 교묘히 비껴간 외교 관련 극비 문서 및 의궤 원본들을 의도적으로 파기, 방화, 혹은 인멸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수 밖에 없다.


조선 본국에 있던 어람본(왕이 보던 책)과 의정부 보관본은 이때 불타거나 사라졌지만, 이미 그전에 명나라 사신의 손을 거쳐 베이징 자금성 황실로 넘어가 있던 원본(진상본)만 역사적 화를 피하고 용케 살아 남았다.


●대한민국에 없는 기록, 오직 이 책으로만 복원할 수 있다●
 

국내에 1621년 영접도감 원본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학계와 서지학계는 광해군 13년의 구체적인 외교 전말을 온전히 연구할 길이 없었다.


이 책은 국내에서 유실된 광해군 최후의 외교 기록을 원형 그대로 완벽히 복원해 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실물 텍스트'다. 


국보급 원본이 사라진 한국 땅에서, 이 1932년 고궁박물원 복간 초판본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사실상 국내 유일본을 독점 소장하는 것과 같은 서지학적 권위를 가진다.

 

본 판매자는 근 1년 동안 이책에 깊게 홀렸다 

그 사이 광해에 대해 공부를 조금 했다 


그간 판매자의 최종 생각을 정리해보겠다


광해군은 인조반정 쿠테타 세력들에 의해 철저하게 망군,폭군으로 격하, 왜곡되었다 


그는 당 시대와 近미래를 제대로 꿰뚫어 본 유능한 그리고 천재 지도자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기 내부의 적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파멸하였다 


광해, 

'어떻게 하면 조선을 전쟁의 아수라속으로 안빠지게 할것인가뿐'의 巨視的 조선의 안녕과 동시에 실리를 좇는, 현명하고 똑똑한 그리고 지극히 현실주의 정치가라고 평가하고 싶다.


참으로 안타깝기가 그지없는 悲運의 지도자였다









판매자 보충 설명
내용추가일시 : 2026/06/11 08:23
광해군은 조선의 기득권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교조적인 헛된 명분(사대주의)과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의 제단 위에 제물로 바쳐버린 억울한 군주이다
내용추가일시 : 2026/06/11 08:16
역설적으로 광해군을 가장 강력하게 복권해 주는 사람은 그를 끌어내린 인조와 서인 세력의 무능함이다. 서인들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지 않고 오랑캐(후금)와 내통했다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나라를 더 잘 지키거나 명나라와 함께 청나라를 무찔렀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얻어맞고, 수십만 명의 백성이 노예로 끌려갔으며, 왕이 오랑캐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대가리를 찧었다.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가 틀렸다고 주장하며 정권을 잡은 자들이 초래한 결과가 '조선 역사상 최악의 대재앙'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도리어 광해군의 외교가 얼마나 정당하고 영리했는지를 반증하는 뼈아픈 팩트다. 역사는 광해군을 연산군과 묶어 군(君)으로 격하시켰고, 대중에게 둘 다 똑같은 폭군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이것은 가장 지독한 왜곡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고, 호적을 정리하고, 동의보감을 편찬하고, 궁궐을 중건하며 밤낮으로 일했던 나라의 시스템을 살리려던 군주였다. 단지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한 정치적 과오(폐모살제)가 있다는 이유로, 그가 이룩한 국가 재건과 외교적 천재성까지 모조리 폭군의 광기로 덮어버린 것은 지독한 역사적 불공정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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