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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산해 42.5*30cm
2. 이원회 44.5*25.3
3. 최일 42.7*29
4. 송치규 36.2*26.5
5. 정헌시 39.8*22.5
조선시대의 매우 좋은 간찰을 수집하실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역사공부 인물공부를 할수 있고 아울러 소박한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들입니다
우선 인물 연구부터 주력해 보시고 취미생활을 확장해 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산해 인물의 간찰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평생 만나기 어려운 희귀한 간찰입니다
1, 이산해 간찰
출생1539 사망1609
이산해는 조선시대 홍문관 정자, 사헌부 집의,'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39년(중종 34)에 태어나 1609년(광해군 1)에 사망했다.
1563년(명종 18) 사가독서를 했고 문장에 능했다.
1588년(선조 21) 우의정이 되고,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북인의 영수'로 활약했다. 1590년 정철이 세자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탄핵하여 유배보냈고, 서인의 영수급
대신들까지 파직·귀양보냄으로써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했다. 북인이 다시 분당할 때 강경파인 대북파 영수가 되었다.
2, 이원회 李元會 간찰
출생 1827년(순조 27)사망 미상
요약 개항기 삼도수군통제사, 대호군,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중곡(中谷). 이기석(李基碩)의 아들이다.
3. 무과 출신으로 1864년(고종 1)부터 1868년까지 선전관(宣傳官)·금위영천총(禁衛營千摠), 승정원의 동부승지·좌부승지, 좌·우승지, 그리고 태안부사를 역임하였다.
1872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뒤 부사를 거쳐 1881년 초 조선조사일본시찰단(朝鮮朝士日本視察團)에 군계선함사차정참획관(軍械船艦事差定參劃官)으로 참가, 총포·선박 등 주로 육군조련(陸軍操鍊) 관계 분야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이 때 이동인(李東仁)은 참모관이었다.
같은 해 9월 도총부부총관에 발탁되었다가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보되었다. 같은 해 11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개편에 따라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에 임명되어, 군무사분국절목(軍務司分局節目)의 결정에 따라 교련국구관(敎鍊局句管)이 되어 근대식 군부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1882년 4월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같은 해 10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885년 11월과 이듬해 4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승급한 뒤 6월 한성부판윤에 승진하였다. 1887년 영국에 의한 거문도 강점사건이 일어나자 거문도경략사(巨文島經略使)로 임명되어 거문도사건의 처리를 위해 활약하였다.
1889년 대호군에 승급, 이듬해 재차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가 되어 친군(親軍)의 장위(壯衛)·통위(統衛) 양영병을 인솔해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과 협력해 전주를 수복하였다.
그 해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중심의 정부가 수립되자 좌포도대장에 기용되었다.
저서로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 4책이 있다.
3. 최일 崔逸 간찰
출생 1615년(광해군 7)사망 1686년(숙종 12)
요약 조선후기 좌승지, 형조참의,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일지(逸之). 호는 석헌(石軒). 최효원(崔孝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잠(崔潛)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최상현(崔象玄)이며,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조여효(曺與孝)의 딸이다. 장유(張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32년(인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46년 음보로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고, 이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지평·교리·정언을 거쳐 1653년(효종 4) 홍천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충청우도추쇄어사(忠淸右道推刷御史)가 되어 당시 노비 등이 주인을 배반하고 내수사(內需司)에 소속되어 있던 것을 모두 추쇄하여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노비와 주인간의 분규를 거국적으로 해결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듬해 경성판관을 지냈고, 1659년 한산군수를 거쳐 1660년(현종 1) 장성부사가 되어서는 기민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
1665년 헌납으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다음해에는 각 관청의 물품출납을 서리(胥吏)에게만 맡기기 때문에 미포(米布)에 대한 농간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책임자의 입회 하에 출납을 엄중히 해서 그 농간을 바로잡을 것을 진언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그 뒤 장령·집의 등을 거쳐 1672년 호조참의, 1677년(숙종 3) 좌승지·형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뒤에 병조·호조의 참판을 지냈다. 일찍이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숙종을 시강할 때, 숙종은 그의 청빈함을 가상히 여겨 초모(貂帽)를 하사한 바 있다.
4. 송치규 宋穉圭 대학자 간찰
출생 1759(영조 35)사망 1838(헌종 4)
조선 후기의 주자학자.
본관은 은진.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환명(煥明)이며, 어머니는 신사덕(申思德)의 딸이다. 김정묵(金正默)의 문인이다.
1798년(정조 22) 경상도관찰사 한용화(韓用和)의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호조좌랑·공조참판·대사헌 등에 잇따라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그가 평생을 두고 벼슬을 사양한 것은 스승 김정묵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유적(儒籍)에서 제적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대의 명망있는 유학자로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72세가 되던 1830년 왕의 간곡한 부름으로 세손의 시강원찬선이 되었고, 이후 대사헌을 거쳐 1831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그는 이동기이(理同氣異)의 입장에서 인물성동이론을 논하여, 기질은 사람과 물(物)이 각각 다 다르지만 본연(本然)은 사람마다 같을 뿐만 아니라 물과 사람도 모두 같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기의 선후에 대해서도 이가 원인이 되어 기가 생겨나지만, 이가 서는 곳[所立]은 기에 있으므로 실은 선후로 나눌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독서궁리(讀書窮理)와 반궁실천(反窮實踐)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고 경(敬)으로서 마음을 다스리는 요법을 삼아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저서로는 〈강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이다.
5 정헌시(鄭憲時)
자성장(聖章)생년1847(헌종 13), 정미(丁未)본관초계(草溪) 거주지한성([京])
이력사항 전력현감(縣監) 동학란을 평정하는데 앞장선 인물로 전해진다
가족사항
조부정기화(鄭琦和)증조정홍관(鄭鴻觀)외조최종준(崔鍾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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