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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3월 17일 22:12:13)

경매번호 2603GFJPM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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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찰단위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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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 크기 미입력
제조국 한국

가로31.5cm          세로52cm

유명작가 회산 박기돈 선생님의 귀한 화조도 작품입니다.

작품성 좋으며,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흠은 있을수 있습니다.

수집된 그대로 등록하니 사진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박기돈(朴基敦, 1873 ~ 1947)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서예가이다. 자는 경림(景臨), 호는 회산(晦山), 취죽헌(翠竹軒), 양정초당(養正草堂), 몽와노인(蒙窩老人), 찬당노인(贊堂老人), 회노(晦老)이다.

생애

조선 고종 10년(1873년)에 박문환(1835~1911)과 그 부인 제주 고씨의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20대 초인 1893~95년경 합천 초계 무릉의 유학자로 대동단에 참여하여 합천에서의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이직현(李直鉉)의 문하에서 약 3년 동안 공부하였다. 29세 때인 1901년 12월 1일 대한제국 양지아문(量地衙門)의 양무위원(量務委員)에 임명되어 첫 관직에 나가게 되고, 1903년 1월 24일 상공학교 교관에 임명되었으며, 1905년에는 중추원 의관이 되었고 6월 27일 정3품 통정대부가 되었다.[1]

그러나 몇 달 뒤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통감부가 설치되는 등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박기돈은 관직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다. 부산으로 내려가 배편으로 상해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부친과 스승이 계신 합천으로 갔다가 이듬해 대구로 나와 상당한 부동산을 마련하고 중구 서야동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06년 당시 대구는 경부선 철도 개통 이후 일본 거류민이 급격히 늘어나 통감부의 하부 행정기구인 대구 이사청(理事廳)이 경상감영의 선화당에 설치되고, 친일파였던 대구군수 박중양에 의해 대구읍성이 무단 철거되면서 일본인들의 토지 매점과 상권 침투로 지역의 경제 주권이 급속히 침탈당하던 시기였다. 대구의 유지들이 이에 대처하기 위해 세운 광문사(廣文社)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을 때 박기돈은 단연(斷煙, 금연) 모금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운동 확산을 위해 서병오, 이종면(1870~1932) 등 10여 명이 《대한매일신보》(1907.7.25)에 광고를 낼 때 박기돈도 참여하였다.[2]

또한 광문사 사장 김광제(1866~1920), 부사장 서상돈(1850~1913) 등 선도적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조양회관을 세운 독립운동가 서상일(1887~1962)과도 교유하였다. 1908년 설립된 대한협회 대구지회에 이일우(1870~1936), 이종면, 서병오 등과 참여하였다. 특히 서상돈과는 1909년 대구목재소를 합자하여 설립하였고, 1911년 대구제분주식회사에도 함께 참여하는 등 긴밀한 협력 관계였다.

이외에도 박기돈은 회산출판사(1910), 은단 등 약품을 생산했던 보혜약방(이관화와 합자), 원대동 제지공장(정봉진과 합자), 대안동에 있었던 대구 최초의 이발관 등 다양한 신상공업을 대구에 이식하였다.[3]

또한 대구의 경제인들이 일본인 거류민들로부터 지역의 상권을 지키고자 세운 대구민의소(1906년 설립)을 대구상무소(대구조선인상업회의소, 1907년)로 개명하였는데, 박기돈이 초대 대구상무소 소장을 맡아 약령시를 활성화시키는 등 근대기 대구 경제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대구상무소는 이후 대구상업회의소(1915), 대구상공회의소(1930), 경북상공경제회(1944)를 거쳐 해방 이후 경북상공회의소(1946)로 개편되는 과정을 거쳐 1953년에 대구상공회의소 인가를 받게 된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는 항일 투쟁의 새로운 양상의 하나인 노동공제회 대구지회 회장을 맡아 노동야학, 강연회 등을 통해 노동자나 사회 일반을 대상으로 계몽 활동을 벌였고, 대구의 신흥지식인과 중소자본가들의 모임인 대구청년회에도 관여하였다.[4] 대구운동협회가 설립되었을 때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앞서 순종 황제의 대구 행차 때에 은사금으로 설립했던 명신학교가 경영난을 겪게 되자 1921년 6월 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의장을 맡았는데[5] 돌연 이듬해에 사퇴한다.[6] 1923년 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가 결성될 때 서상일, 이종면, 서병오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7]

1924년 명신여학교를 서희원 여사에게 양도한 이후 박기돈은 사회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서예 활동에 전념하여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다. 이미 경제인으로 활동하던 1922년에 대구 서화가들의 미술단체인 교남서화연구회가 창설되었을 때 부회장을 맡았는데[8] 이는 박기돈이 전적으로 서예에 몰두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문우관 주최로 사흘 동안 열린 백일장에서 심사를 맡기도 하였다.[9] 1933년 영남에 큰 수재가 났을 때 교남시서화연구회가 금호관에서 개최한 수재민 돕기 '서화 즉매회'에 박기돈은 서병오, 허섭, 김진만, 배효원, 서동균, 이원일 등과 참여하였으며,[10] 합천 야로의 제방 수리에 사재를 쾌척하기도 하였다.[11]

1940년 박기돈 자신의 본관지이기도 한 밀양의 지방 유지의 초청으로 밀양제1공립심상소학교에서 개인전 '박회산 서도 전람 대회'를 열었다. 이때 그의 나이 예순여덟이었다. 당시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는 참가회원 백 수십 명과 3백여 명의 관람객이 모여 '공전의 큰 성황을 이루었다'[12]고 보도하였다.

1947년 사망하였다. 향년 75세.

박기돈의 묘소는 실묘한 상태였으나 외손자인 김상영(1935~2014) 경북대 행정학과 명예교수가 1986년 묘소를 경상북도 경산시 백합공원묘원 '동특 78' 구역에 조성하고, 대구상공회의소에서 나서서 대구상공회의소 창립 80주년 기념사업으로 대구상공회의소의 초대 소장이었던 그를 기려 건립하였다. 비문은 대구가톨릭대 국문과 권영철(1928~2006) 교수가 지었고, '門人 裵吉基 篆 義城后人金台均 書'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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