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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품 크기 | 각 33CM X 121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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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조국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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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 김정섭(1890년 ㅡ1988년)님은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에서 금·은 일을 배운 마지막 제자이다. 3·1운동으로 학교가 장기간 쉬게되자 그가 미술적 재능을 살리기 위해 택한 곳이 왕실 출자의 제작소였다.
그때만 해도 공예란 말이 없었고 그런 특수한 솜씨를 가르치는 교육시설이나 특정작가도 없던 시절이다.
종래에는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기물을 공급하기 위해 상당수의 기술자들이 각 관아에 예속돼 있었다. 이른바 경공장이다. 그런데 왕조가 쇠퇴해지면서 그들마저 다스리지 못하게돼 장인들은 자연히 흩어져 생업을 구하게 마련이었고, 따라서 질적 저하를 막을 길이 없었다.
1908년에 발족한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는 말하자면 전래 수공예를 새롭게 진작시켜 보려는 왕조의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그 무렵 단기의 관립공업전습소가 있긴 했지만 왕실에서는 더 큰 안목으로 미술품제작소를 따로 설치해 직접 운영할 이유가 있었다. 즉 보다 뛰어난 기술 향상과 특제품을 얻으려는 목표가 그것이었다. 물론 한일합방으로 그 조그마한 노력마저 수포로 돌아갔고 점차 일본인들의 손아귀에 넘어가 당초의 의도는 자연히 변질되었다.
어쨌든 미술품 제작소는 그 나름으로 당시 최고의 공예가 양성기관이었다. 5∼7년간 일을가르치면서 하루 품삯 15전(당시 쌀값이 1말에 12전)을 지급하는 반교육 시설이었으므로 인소 심사를 다소 까다롭게 치렀다. 그 안에는 금공·목공·칠공·석공·염색등 여러 분야가 있어 항시 2백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제대로 일을 배우기만 하면 졸업후 벌이가 괜찮게 보장됐다. 그래서 지망자가 많았다.
김옹은 돈화문앞 권농동 태생의 서울 토박이. 보통학교때 공진회 미술전에 입선한 것이 여간 대견스런 사건이 아니었지만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또 동경유학 바람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으나 선뜻 그것을 허락할 가정형편도 아니었다.
<해강에 서화 사사>
3·1운동후 보성학교(중학)를 쉬는 동안 그는 우선 글씨공부를 하게됐고 스승(이항원)의 권유가 상당히 솔깃하게 귀에 들렸다.
『이씨는 원판 재주있는 분이어서 지전판(위조지폐용 금속판)을 만들었다가 사형언도까지 받았는데 재주가 아까워서 살려줬다는 일화가 있는 분이죠. 쪼이질의 선각을 기막히게 잘 하셨으니까요.』
과연 김옹이 전공한 금공의 쪼이일은 시대적 취향에 적중한 재능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 그의 나이 아직 30세도 안된 터인데 월수 2천원까지 올렸다.
그는 글씨를 잘 쓰는 것이 장기여서 명성을 이미 얻었기 때문이다.
미술품 제작소의 교육은 바로 기초를 다지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들어가자 반년동안 글씨공부였다. 주로 전자와 팔분례서·해서를 가르쳤기 때문에 아예 시간을 내 해강 김규진선생한테 서화 사사하기를 그럭저럭 5년간이나 계속했다. 그것은 뒷날 큰 자산이 되었다. 필력을 다져놓은 덕택으로 그 당시 서울 장안에서 각장이 30여명이나 있었지만 글씨를 경비한 사람이 몇 안됐고 그 중에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루저녁 1류 요리집 술값이 20∼30원이면 족하던 시절이다. 국일관·명월관이 다 외상으로 통했고, 하도 돈을 무더기로 쓰니까 형사들이 뒤를 밟는 사단이 벌어지기도 했다.
<직업학교 강의도>
쪼이질이란 아주 작은 정으로 금은을 쪼아 세공하는 일이다. 흔히 은공이라 하면 주전자·화범·신선로·담배합등을 만드는 대공방과 비녀·가락지·패물·수저등 소품 위주의 세공방이 있으며, 무늬를 위해서는 조이방이 따로 있어 분업화돼 있었다.
김씨는 쪼이의 명수였고 화조·십장생·박쥐·사군자·용호·당초등 어느 문양이나 생동감있게 잘 묘사해내 곧 명성과 직결되었다.
그는 미술품 제작소에서의 수업과정이 남보다 빨랐거니와 졸업하자 돈있는 일본인이 물주가 되어 동업했다. 뿐더러 저녁이면 경성직업학교 강사로 나가 신진들을 지도하는 일도 맡았다. 스스로 돌이켜봐도 놀라운 급성장이었다. 중국대사관 앞에 4천원을 주고 새 점포를 사 서 공장도 차렸다.
그의 인기를 더해주는 노하우는 그때 다이아몬드 끼우는 기술이었다. 다이아몬드 1캐러트에 4백원하던 때인데, 전에 일본에서 불러온 기술자가 다이아몬드를 박다 깨는 사례가 몇번 있었으므로 그 일거리가 김씨에게 몰려왔다. 5분이면 되는 일이지만 2∼3일 묵혀 두노라면10원하던 공전이 자꾸 올라갔다. 공전을 올려달라고 흥정해서가 아니라 일을 빨리 해가기 위해 고객측이 값을 올려 선돈을 맡기는 터였다.
『그땐 벌어도 벌어도 모자라더군요. 벌기도 쉬웠고 쓰기도 쉬워서 밤낮 그럴 줄만 알았는데 세월이라는게 어디 그럽디까. 지금은 다 세상 떠났지만 옆에 친구들이 한달에 1백원씩만 땅 사자고 하는 것도 다 뿌리치고 웃었더니….』
2차대전이 일어나자 금은방시세가 없어져 화신백화점에 들어가 월급장이가 됐다. 해방후 잠시 반짝 장사가 되는가 싶더니 6·25동란으로 부산으로 쫓겨갔다. 그리고 수북후에도 월급장이 공장장이 되었지만 지난날의 시세 좋던 시절이 다시 돌아올리 없었다.
<현대공예와 비타협>
귀금속이 귀하던 시절에는 은제품으로 모두 만족해했고 거기에다 여러가지 무늬를 놓는 기술이 돋보였지만 이젠 금제품시대로 바뀐 것이다.
금제품은 은제품과 달라 덧치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따라서 그의 장기를 구사할 기회가 점점 줄어든 것이다.
사실 김옹의 남다른 솜씨는 촛정·공근정·다질정·눈깔정 작고 예리한 정을 써서 귀금속을 조각해내는 기술이다. 가는 선으로 음각한다든가(선각), 그 음각한 자리에다 은이나 오동으로 뽑은 철사를 메워넣는 방법(은상감), 끝이 납작한 다질정을 가지고 금속관을 깊고 혹은 얕게 따내 모필화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기법(화각), 노리개 제작에 많이 적용되는 쪼이 무늬판의 땜질법(고각), 특히 금속판의 앞뒤를 다져가면서 무늬가 도드라지도록 뚜드려 대는 내각 솜씨는 가장 자랑으로 삼는 대목이다.
김옹은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35호 조각장의 보유자로 지정됐지만 용돈은 오히려 서예병풍으로 얻어 쓰는 형편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솜씨의 물건이라도 귀한 줄 모르는걸 어쩌겠는가.
귀금속은 유행에 민감하고 세도와 돈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기물의 형태와 문양을 오늘의 취향에 맞게 재빨리 회전시켜야 돈을 버는데, 「밤낮 옛날만 생각하고 사는」-그의 고집으로는 현대공예와의 타협이 거의 불가능한 과제다.
백하님은 그런 현실이 안타깝고 서글프지만 현대공예의 물길과 당장 어떻게 접근할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코 전통과 현실이 별개가 아니요, 서로 공존하는 속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한국의 전통공예는 어쩐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씻을 수 없다.
생존시 전서에도 일가견이 있엇으며.
작품성 형태미 장식성 소장용으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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