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귀중/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 정치 문화 사회 종교等 방대 기록書/ 일본 대표적 역사서 <일본서기>15冊, 완질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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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국 일본

낙장 무

日前에 일본서기를 판매했는데, 서고에 또 일본서기 한질(15책, 완질본)이 마침 보여 경매에 올립니다 

전에 판 것은 완질본이 아닌데(抉冊이 있는) 이번 매물은 온전한 완질본입니다


본판매자가 책을 대강 읽어 보니 고구려 백제 신라 기록이 실제로 방대하고ㅡ고구려, 백제, 신라를 빼면 일본 역사를 아예 쓸게 없을 정도로ㅡ 자세하게 기록되었음을 확인하였고 관련 페이지마다 色종이 견출지를 부착해놨습니다(이미지 사진 참조)  물론, 대강 검토했기에 빠뜨린 페이지도 많을 것이니 낙찰자 분께서 더 찿아 보시길., 



***《일본서기》는 일본 최초의 국가공인 정사(正史)로, 나라 시대인 720년,요로(養老) 4년 편찬***

한 것을 본매물은 寶曆 9년(1759년)에 중간한 책



***全冊에 걸쳐 -----삼국사기에도 안나오는-----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치, 역사, 전쟁, 사회, 문화,종교等이 다량,방대하게 기록된 일본 대표 역사서***


일본의 건국 신화 시대부터 제41대 지토 천황(持統天皇)이 퇴위한 697년까지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서와 같은 편년체(編年體, 연대순 기록)로 기술한 역사서.


이책을 며칠 동안 관심있게 읽어 보니 " 일본역사, 일본인의 정체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 없이는 제대로 형성될 수도 없었고

아무것도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3류 민족이다"라는 생각이 최종으로 듭디다 (이런 미개했던 족속들한테 임진왜란, 36년의 치욕스러운 식민지배를 당했다는게 참.,)


1. 본 매물인 이 冊의 편찬배경을 들여다 보니,


고대 일본(왜)의 역사적, 문화적 기반

《일본서기》가 편찬되던 7~8세기, 그리고 그 이전 시기(4~6세기)에 고대 일본은 한반도 국가들과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고대 일본은 문자와 불교, 유교, 각종 공예 기술 등 대부분의 선진 문물을 주로 백제와 가야(임나)를 통해 받아들였다. 




한반도의 이주민과 기술자들이 일본 사회의 발전에 깊숙이 관여했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들 국가와의 관계는 필수적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 국가들과의 외교적 교류, 군사적 동맹(주로 백제와의 연합), 그리고 전쟁(특히 백제 멸망 후 백촌강 전투 등)은 일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으므로 상세히 기록되었다.



사실을 왜곡하여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임나일본부설 등)도 나온다.


비록 《일본서기》의 한반도 관련 기록에 일본 중심의 일부 왜곡이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동시에 한국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집으로 맞다는게 중론이다.


 한국의 정사인 《삼국사기》에도 안나오는 세부적인 사건등,ㅡ 백제 의자왕 동정기록, 무령왕의 행적 등 ㅡ《삼국사기》에 없거나 미진한 부분을 《일본서기》의 기록과 교차 검증하다보면 우리나라 고대사의 상세 사건을 맞추는 데 도움이 된다.(*우리나라의 <삼국유사>, <용재총화>등은 역사라기 보다는 설화, 민담에 가깝다)


결론적으로, 《일본서기》에 한반도 관련 기록이 많은 것은 고대 일본과 삼국 간의 실제적이고 절대적인 밀접한 관계 때문이었다


2. 책내용을 대강 읽어보니,


《일본서기》에 실린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반도 삼국 관련 기록은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문화적, 종교적 교류 기록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정치 및 외교 (가장 높은 비중)

한반도 삼국의 기록은 주로 왜(倭, 고대 일본)와의 외교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


삼국 간의 전쟁 상황(고구려와 신라의 대립 등)이나 왜가 삼국 중 한 나라를 지원하는 형태로 군사적 개입을 하는 기록이 많다.


주로 왜와 한반도 국가 간의 군사적 충돌 및 협력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온다.


 왜가 백제, 가야 등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거나, 신라를 정벌하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예) 신라가 고구려의 침공으로 위험에 처하자 왜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기록, 백제 멸망 후 왜가 백제를 돕기 위해 참전한 백촌강 전투 기록 등.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나 삼국 간의 국경 분쟁 등 동아시아의 주요 군사적 상황이 왜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형태로 기록.


고대 일본 사회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문화와 기술의 전래는 긍정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불교, 유교, 각종 공예 기술(직조, 건축 등)을 백제 등으로부터 받아들인 것도 기록.


예) 백제에서 왜에 불경, 불상, 의사, 기술자 등을 파견하거나 전달한 기록. (특히 백제 관련 기록이 가장 풍부함)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술자나 지식인(도래인, 渡來人)들이 왜 조정에서 활동하며 관직을 맡거나 일본 귀족 가문의 시조가 되는 기록.




조공품의 종류(철제 방패, 과녁, 각종 물자 등)나 교환된 물품에 대한 기록等이 실려있다


일본의 건국 신화 시대부터 제41대 지토 천황(持統天皇)이 퇴위한 697년까지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서와 같은 편년체(編年體, 연대순 기록)로 기술한 역사서.

 3. 고구려, 백제,신라와 얽힌 주요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 보니,


1. 백제 성왕의 전사와 관산성 전투 (554년)
『일본서기』는 백제 성왕(聖王)의 비극적인 최후를 한국의 『삼국사기』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러 가다 관산성(지금의 옥천)에서 매복에 걸려 전사한 사건.

신라의 하급 관리였던 '고도'가 성왕의 목을 베기 전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성왕이 죽음을 앞두고 "내 머리를 가져가 너희 왕에게 바치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대목 등은 당시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적대 관계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건이다.

2. 고구려 을지문덕의 승리와 살수대첩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소식은 당시 왜(일본) 조정에도 큰 충격이었다.

 수나라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승전보가 일본에 전해진 기록.

 당시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전과를 과시하고 왜를 우군으로 포섭하기 위해 포로와 노획물 등을 일본에 보내기도 했다. 『일본서기』는 이를 통해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의 강력한 패권국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3. 백제 멸망과 백강구(白江口) 전투 (660년 ~ 663년)
일본서기,  본 매물 책에 상당히 할애될 정도로 일본 역사상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한반도 관련 사건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은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수만 명의 대군과 수백 척의 함선을 보낸다. 하지만 금강 하구(백강)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한다.

 백제의 왕자 부여풍이 일본에서 귀국하는 과정, 부흥군의 지도자 복신과의 갈등, 그리고 백강에서 "하늘이 타는 듯했다"고 묘사된 패전의 기록은 백제와 왜가 얼마나 긴밀한 혈맹 관계였는지를 보여준다.


4. 신라의 삼국 통일과 일본의 방어 태세
백제 멸망 이후 신라가 한반도를 장악하자 일본은 극도의 공포에 빠졌다.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을 두려워한 일본이 백제 유민(기술자)들을 동원해 다자이후(태宰府)에 수성(水城)을 쌓고 산성을 축조하는 과정이 상세히 나온다.

신라는 일본에 사신을 자주 보내며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일본서기』에는 신라 사신들이 가져온 물품과 그들을 접대한 기록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며, 때로는 신라를 '번국(조공국)'으로 깎아내려 기록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대등하거나 신라가 우위에 있었던 외교적 실태를 보여준다.


5. 백강구(白江口) 전투 (663년):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대전
백제가 멸망(660년)한 후,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일본(왜)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며 벌어진 전투.

 일본은 3차에 걸쳐 총 2만 7천여 명의 병력과 800~1,000척의 함선을 보냈다. 당시 일본으로서는 국가의 명운을 걸었다.

663년 8월, 금강 하구(백강)에서 나당 연합군(당나라 수군 170척)과 격돌했다. 『일본서기』는 이때의 참상을 "일본 군선 400척이 불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군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함대는 당나라의 화공(火攻)과 전술에 완전히 괴멸되었다. 이 패배로 백제 부흥 운동은 종말을 고했고, 일본은 이후 수십 년간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두려워하며 규슈 지역에 거대한 방어 성벽을 쌓는 등 '고립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참고; 백제 의자왕義慈王 '해동증자'와 '망국의 군주' 사이의 진실
우리가 흔히 아는 '삼천궁녀'나 '방탕한 왕'의 이미지는 후대에 만들어진 허구에 가깝다.

『삼국사기』조차 즉위 초 의자왕을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렸다"고 기록. 그는 즉위 후 신라의 대야성 등 40여 개 성을 함락시킬 만큼 강력하고 영민한 군주였다.


재위 후반기, 의자왕은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존 귀족 세력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이 자신의 아들들(41명)을 대좌평 등 요직에 앉히며 귀족들을 소외시켰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이 결국 멸망 당시 귀족들의 비협조(배신)로 이어지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일본서기』 속의 의자왕 기록은 의자왕을 무능한 왕으로 묘사하기보다, 백제 멸망 소식을 듣고 일본 조정이 "백제는 스스로 망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망하게 한 것이다"라며 통곡했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일본이 의자왕의 백제를 얼마나 강력한 의지처로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낙화암과 삼천궁녀 사건은 조선 시대 문학적 소설일 뿐, 당시 사비성의 인구 규모나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완전한 허구다.
 

660년 소정방과 김유신의 군대에 포위되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난했으나, 믿었던 부하(예식진)의 배신으로 결국 항복하게 된다. 이후 당나라 낙양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병사했다. 그의 묘비명이나 구체적인 최후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최근에야 중국에서 발견된 묘지석 등을 통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의자왕의 비극은 '내부의 분열'과 '국제 정세의 오판'이 맞물린 전형적인 망국의 사례이다. 


가혹한 역사 속에서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안위와 권력 강화(아들들을 요직에 앉힘)에 매몰될 때, 나라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특히 백강구 전투에서 수만 명의 군인이 수장된 것은, 리더의 잘못된 판단이 불러온 '무자비한 희생'의 전형이다.


660년 백제 멸망 후, 의자왕은 태자 부여융을 비롯한 왕족, 귀족, 백성 1만 2천여 명과 함께 당나라 수도 낙양(洛陽)으로 압송되었다.

낙양에 도착한 의자왕은 당 고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비는 치욕적인 의식을 치러야 했다. 

의자왕은 낙양에 도착한 지 불과 몇 달 만인 660년 11월경에 병으로 사망했다. 『삼국사기』는 그가 "병으로 죽었다"고 간략히 기록하고 있으나, 갑작스러운 망국과 압송 과정에서의 심한 정신적 고통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자, 여담이 길었습니다 

다시 일본서기로 돌아갑시다

6, 백제 멸망 전후로 일본으로 건너간 유민들은 당시 미개했던 일본 사회를 송두리째 바꾼 '지식 정보의 핵심'이었다.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과 부여선광을 비롯한 왕족들이 일본에 머물며 선진적인 관등제와 행정 시스템을 전수했다고

기록. 특히 백제의 귀족 '귀실집신' 등 700여 명의 유민이 한꺼번에 이주했을 때, 일본 조정은 이들에게 관직과 토지를 주어 국정 운영의 핵심으로 삼았다.

백강구 전투 패배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침공을 두려워한 일본은 백제 유민들의 기술력을 빌려 국방력을 강화했다. 백제식 산성인 대야성(오노성)과 수성(미즈키)이 이때 쌓아졌으며, 이는 현재도 일본 규슈 지역에 유적으로 남아 있다.

 오경박사 등 백제의 지식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한자와 유학을 가르쳤다. 일본의 초기 문학이나 법령이 한자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백제 유민들의 영향이다.

일본의 국보급 사찰인 비조사(아스카데라)나 사천왕사(시텐노지)는 백제의 건축가와 와박사(기와 기술자)들이 지은 것이다. 일본 불교 미술의 정수로 꼽히는 '호류지 백제관음상' 역시 백제의 예술적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서기』는 백제 멸망 당시 일본 현지의 긴박한 상황과 망명객들에 대해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이 당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졌을 때, 일본 조정이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구나, 조상의 묘를 어찌 다시 가보겠는가"라며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귀족 귀실집신(鬼室集信) 등 유민 700여 명이 일본으로 건너왔을 때, 일본 천황이 이들에게 '학직두(學職頭, 교육 장관 격)' 등의 관직을 주고 실무를 맡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제 장군 답분춘초(答㶱春初) 등이 지휘하여 일본 규슈 지역에 백제식 산성을 쌓았다는 팩트 역시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7.『일본서기』에는 김춘추(무열왕)와 김유신 같은 신라의 주역들에 대해서도 매우 흥미로운 팩트들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 일본 측의 독자적인 시각이 담겨 있어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



외교의 달인 김춘추(무열왕)는 "용모가 수려하고 담소를 잘했다"고 기록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김춘추가 고구려와 당나라에 간 기록은 있지만, 일본에 갔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일본서기』 효덕천황(孝德天皇) 조에는 김춘추가 647년에 일본을 방문한 사실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는 김춘추에 대해 "춘추는 용모가 수려하고 담소를 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 조정이 그에게 받은 인상이 매우 강렬하고 긍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김춘추는 백제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왜)을 포섭하여 고립시키거나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다. 비록 당시 일본 정권이 친백제 성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춘추의 개인적 역량이 일본 지배층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점은 사실이다.

 승전국의 장군 김유신, "이름이 만리에 진동했다"
김유신은 직접 일본에 간 적은 없지만, 그의 명성은 일본 역사서에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인 668년, 신라 사신 김동암이 일본에 갔다가 귀국할 때 일본 조정은 김유신에게 줄 선물로 배 1척을 따로 준비했다. 이는 일본이 비록 백제를 도우려다 패배했지만, 승전국 신라의 실질적 권력자인 김유신을 무시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8, 신라의 충신 박제상에 관한 이야기도 『일본서기』에 일본식 이름으로 실려 있다.

『삼국사기』의 박제상 이야기는 『일본서기』에서는 신궁황후(神功皇后)의 신라 정벌 이야기와 얽혀 나온다. 신라 왕(파사매금)이 일본에 인질로 잡힌 왕자를 구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속임수와 처형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 기록은 박제상의 '충절'에 집중하지만, 일본 기록은 일본의 위엄과 신라의 '항복'을 강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이용한다. 하지만 박제상이라는 인물이 일본까지 건너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했다는 핵심적인 사실관계는 일치한다.


9,『일본서기』 속의 연개소문(이리카스미, 伊梨柯須彌)'이리카스미'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 조정 역시 고구려의 정변과 연개소문의 등장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루었다.

642년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 이 소식은 즉시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서기』는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대신 180명을 살해했다"는 팩트를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와 신라의 압박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으려 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사신들이 일본에 와서 연개소문의 집권 정당성을 설명하고 선물을 보낸 내용이 나온다.

일본 기록들은 연개소문을 매우 두려우면서도 거대한 인물로 묘사한다. 당시 일본의 실권자였던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천지천황)가 벌인 '을사의 변(정변)'이 연개소문의 정변 모델을 참고했다는 학설이 있을 정도로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신라와 일본 사이의 긴박한 외교 팩트 (640년대~660년대)
당시 신라와 일본은 겉으로는 사신을 주고받았으나, 속으로는 서로를 극도로 경계하고 이용하려 했던 '살얼음판 외교'를 펼쳤다.

앞서 말씀드린 647년 김춘추의 방일을 일본 측은 "신라가 인질을 보냈다"고 기록했지만, 실상은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기 전 일본이 백제 편을 들지 못하게 묶어두려는 고도의 기만술이었다. 김춘추는 일본 지배층과 직접 담소하며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는 '정찰' 임무를 수행한 셈이다.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기 직전까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이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내자 신라는 당나라 수군과 함께 일본 함대를 백강구에서 전멸시켰다.

백강구 전투 패배 후, 일본은 신라군이 섬으로 쳐들어올까 봐 공포에 질려버렸다. 『일본서기』에는 "밤낮으로 봉화를 올리고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 대마도부터 규슈까지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신라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우리는 너희를 칠 의사가 없으니 안심하라"고 달래면서도, 뒤로는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다시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병 주고 약 주는' 고도의 외교를 펼쳤다.



고구려(연개소문)는 살아남기 위해 바다 건너 왜국에 손을 내밀었고,

신라(김춘추)는 적진의 심장부에 들어가 웃으며 상대의 눈을 가렸다.

일본은 백제라는 오랜 파트너를 잃지 않으려다 국가적 재앙(백강구 참패)을 맞았다.........


스토리에 몰입되다 보니 설명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자, 여기까지.,

 



 

판매자 보충 설명
내용추가일시 : 2026/01/19 21:41
맨 아래 보충설명부터 먼저 보셔야 순서가 맞습니다 본 판매자야 이책 내용을 대강 알고 있고, 워낙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책이라 바둑 復棋하듯 소 되새김하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다시 풀어 보았습니다
내용추가일시 : 2026/01/19 17:43
670년대 이후 신라는 일본을 더 이상 대등한 이웃으로 보지 않았다. 『일본서기』에는 일본 지배층이 신라 사신들 때문에 뒷목을 잡았던 기록들이 생생하다. 신라 사신들은 일본에 도착해 우리가 너희보다 높으니, 너희는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압박했다. 671년경 신라 사신 김동암 등이 일본에 갔을 때, 그들은 일본 천황 앞에서 신라 왕의 권위를 내세우며 일본식 의례를 따르지 않았다. 『일본서기』는 이를 "무례하고 오만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 이는 신라가 당나라를 몰아낸 후 동아시아의 주역이라는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신라는 문서를 통해 "우리는 당나라의 대군도 물리쳤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는 일본에게 " 까불면 너희도 백강구 때처럼 전멸할 수 있다"는 무력시위나 다름없었다. 결국 일본은 분노하면서도 신라 사신들에게 '대상(大賞)'을 내리며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2. 유민들의사이타마현의 '고마(高麗) 신사' 나라를 잃고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인들은 춥고 낯선 땅에서 자신들만의 성벽을 쌓고 살아남았다. 고마군(高麗郡) 설치 (716년): 일본 조정은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 1,799명을 모아 당시 오지였던 무사시국(현재의 사이타마현)에 '고마군'을 만들게 했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족 중 한 명인 고약광(高若光)을 모시는 신사가 지금도 사이타마현에 남아 있다. 고약광은 유민들을 이끌고 거친 땅을 개간하며 생존을 진두지휘했던 리더였다. 고구려 유민들은 일본에 철기 제작 기술과 마구(말 장비)를 전수했다. 특히 고구려식 기마 전술은 훗날 일본 무사(사무라이) 계급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내용추가일시 : 2026/01/19 17:29
고구려가 최종적으로 멸망(668년)하자, 고구려의 귀족들과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대거 망명했다『일본서기』에는 666년에서 716년 사이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 관동 지역(현재의 사이타마현 등)에 정착하여 '고려군(高麗郡)'이라는 자치 구역을 만들었다는 팩트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일본이 고구려의 선진 기술(철기, 목공 등)을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신라 통일 이후, 일본에 보낸 외교적 압박 (최후통첩성 문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더 이상 일본에 저자세로 나오지 않았다. 당시 신라 문무왕과 신문왕 시기에 일본에 보낸 외교 메시지는 매우 강압적이고 권위적이었다. "번국(藩國)으로 들어오라": 신라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들을 '상국'으로, 일본을 '하국'이나 '번국(제후국)'으로 취급하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서기』에는 신라 사신들이 일본의 의례(예: 천황에게 절하는 방식)를 거부하거나, 신라 왕의 권위를 내세우며 일본 조정을 당혹게 했다는 기록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나당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을 압박했다. "우리가 당나라를 몰아냈으니, 이제 동아시아의 질서는 우리가 주도한다" 일본은 백강구 전투의 패배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신라의 이런 고압적인 태도에 분노하면서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신라 사신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막대한 답례품을 보냈다. 사실상 '실질적인 조공 관계'가 형성되었다. 신라는 춥고 가혹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승자가 된 후, 과거의 적이었던 일본을 향해 거침없이 권력을 휘둘렀다. 일본은 자존심을 버리고 '안위'를 택했다. 굴욕적인 신라의 국서를 받으면서도 신라와의 무역을 통해 선진 문물을 계속 받아들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내용추가일시 : 2026/01/16 12:27
입찰방해(황당한 문의),미입금,구매거부,반품자는 제 물건 영구입찰제한자로 등록합니다 신중입찰바랍니다 보관,배송지연 안합니다 배송독촉금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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