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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 크기 | 액자 55.5 * 69.5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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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국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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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55.5 * 69.5 cm
작품 33.5 * 39 cm
* 유리위로 찍은 이미지입니다
이미지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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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張旭鎭, 1917~1990.12.27]
1917년 충남 연기(燕岐)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2고보, 양정고보를 거쳐 도쿄[東京]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8년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 등과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1945~1947년 국립박물관 학예관, 1954~1960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60년에 사직한 이후로 작품활동에만 몰두하였다.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8년 분청사기에 그림을 그린 도화전을 열었고,
1983년 판화집을 냈다. 동화·전설·이웃 등 친근한 소재를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성으로 그려내었으며,
동양화적인 수법에 동양적 철학사상을 담아냈다는 평을 들었다.
주요작품으로
<까치》(1958), 《두 아이》(1973), 《집》(1978), 《가로수》(1978) 등이 있으며,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197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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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업적
장욱진(張旭鎭) : 1917~1990. 서양화가.
신사실파 동인으로 향토성과 서정성이 짙은 화풍을 일구었으며,
동양화적인 수법에 동양적 철학사상을 담아냈다는 평을 들음.
만년에 중앙일보 제정 예술대상을 받았고,
6.25동란때 그린 "자화상"에서 전란을 이겨내려는 꿈을,
작고하기 직전에 그린 "밤과 노인"에서 죽음의 예감을 그림에 담았음.
주요작품으로는《까치》,《두 아이》,《집》,《가로수》등이 있음.
장욱진(1917~1990)은 ‘타고난 화가’였다.
장욱진이 그림 공부에 뜻을 두기 시작했던 때는
그림이 전혀 호구지책이 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이 그림 그리는 짓을 천형(天刑)이라 여겼음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
보람의 순간이라는 믿음에는 한평생 흔들림이 없었다.
창작의 고통은 가열(苛烈)했을망정,
세상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는 것이 삶의 기쁨이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 20세기 대부분이 식민압제, 분단, 동족상잔, 절대 가난에 시달리던
간고(艱苦)의 세월이었음에도 명리(名利)와는 담을 쌓은 채,
오직 그림에 심취한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음은 불행중 다행이었다.
장욱진이나 이중섭, 박수근 같은 ‘환쟁이’들이 모두 그런 자부심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1910년대 중반에 태어난 화가들이라는 사실은 분명 우연이다.
하지만 우리 전통사회 몰락이 드디어 최저 극점에 달했던 시점에서 일단의 저명 화가들이
태어났음은 필요가 발명을 낳듯이, 반전(反轉)의 기운을 예감했던 필연이지 싶다.
세상의 냉대를 이기겠다는 용기와 독공(獨工)이 헛되지 않아 그들의 그림들이 하나같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화재로 높임 받기에 이르렀고
이 여파로 그림공부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장욱진은 ‘미술근대화의 선봉’이었다.
직업화가로서 장욱진의 활동은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 참여로 본격화된다.
신사실파는 1947년에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결성한 것.
의기충천하던 젊은 작가들이 조국광복의 새 기운을 조형세계에서도 진작시켜 보자며
새 기치를 들고나선 의욕의 모임이었다.
새 기치란 미술의 근대화를 말함인데 서양쪽에선 고갱, 고호로 대표되는 후기인상파가
그 효시였다. 이는 대상과 닮게 그리는 사실(寫實)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주관을 중시하는 그림의 새 조류인데,
동인들이 ‘신사실’이라 이름붙인 것은
사실과 주관의 접목이란 뜻이다.
신사실파는 피난지 부산에서 개최한 동인전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해방 이후 최초로 주체적 조형의식을 바탕으로 추상주의 경향을 보여주었던
신사실파 동인들은 하나같이 우리 현대화단에 우뚝 솟았던 별이 되었다고
한국예술원이 펴낸 한국미술사전에서 적고 있다.
장욱진은 ‘세상을 감싸는 그림’을 그렸다.
장욱진 그림은 한마디로 어린이의 동화(童畵)처럼 천진하다.
그러나 천진 가운데서도 사회의식은 명료했다.
6.25동란이 한창이던 1951년에 그린 자화상이 삶에 대한 치열한 의식을 증거하는 물증이다.
전화(戰禍)를 피해 부산 피난살이를 계속하다가 어린시절에 떠났던
고향 충남 연기군 동면으로 잠시 돌아간다.
거기서 절망과 파국의 세상을 뒤로한 채, 창작에 몰두하면서 그려낸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화상이다.
그림 전면에 벼가 익는 논밭을 지나 유유히 걸어나오는 신사가 등장하는데,
콧수염 기른 모습이 영락없는 화가다.
영국 신사풍의 인물과 주변의 목가적 풍경이 어우러진, 화면 어디에도 전쟁의 흔적이라곤
티끌만큼도 찾을 수 없다.
언뜻 난리통에 무슨 뚱딴지같은 그림이냐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사람이 퍽퍽 죽어 가는 마당에 꿈에나마 그리운 것이 평화 아니겠는가.
고달픈 현실에 발을 딛고 있긴 하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음이 삶인 것.
하지만 보통사람은 쉽게 그런 마음의 짬을 얻지 못한다.
이 틈새를 채워주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기에,
자화상에서 처럼 파국을 이긴 평화의 위대성을 증거해서
세상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준다.
세상의 부조리, 삶의 각박함을 이겨내려는
화가의 의지 곧 ‘창조적 긴장’이 스며있는 것이다.
창조적 긴장이 고조되면 거기에 삶의 지혜가 묻어난다.
농촌풍경을 즐겨 그렸던 장욱진의 그림은 산업화 이전의 풍경을 회고적으로 그려 향수를
자극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도시산업화가 궤도에 오르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때묻지 않은 자연과 환경을 그리워할 것임을 선지(先知)적으로 그려둔 것이기도 하다.
장욱진은 ‘전업화가의 가능성 실증(實證)’이었다.
우리 사회도 산업근대화의 성공 덕분에 그림시장이 생성되면서
화가가 생업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그림이 독자 생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회의가 많다.
그래서 화가들이 교직(敎職)을 겸하기 일쑤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창작의 길은
교직과 겸직이 허락될 정도로 평이한 삶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어렵사리 구했던 서울대 교수직(1954-1960)을 장욱진은 6년만에 사직했다.
창작 전념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자신 내면에서 길을 묻고 거기서 확신을 쌓아가야 하는 치열한 자기투쟁의 길이다.
투쟁의 고달픔을 자연에서 위로 받고자
외진 산골 화실(덕소,1963-75 : 수안보,1980-1985 : 신갈,1986-1990)을 전전했다.
타협을 모른 채, 오로지 그림에 매진했던 그의 방식은
화가의 길에 들어선 수많은 작가지망생들에게 앞날을 기약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장욱진은 ‘예술교육의 참스승’이었다.
미대 교수시절 장욱진은 교실에서 열심히 그리는 학생들의 화판 앞으로 다가간다.
학생들마다 선생이 자신의 그림에 관심을 보여주는 신호라 여겨
은근히 격려 한마디 말을 고대한다.
그런데도 장욱진은 손바닥으로 화폭을 이리저리 가려보기만 하다가
말없이 훌쩍 교실을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장욱진의 미술교육관은 간단했다.
“제자도 없고 스승도 없다”는 것. 다른 예술도 그렇듯이 미술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행보(行步)이기에 그림교육이라면 그리기를 좋아하는 후배들에게
나름대로 열심히 그려보라는 격려만이 있을 뿐이라는 암시다.
그런데도 “큰 배움을 얻었다”는 후배들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 화단의 동량들인 김종학, 윤명로, 김봉태, 이만익 같은 서양화가나
조각가 최종태, 한용진 등이 그들이다. “만들지 않았는데도 만들어졌다”(不作之作)는
무아(無我)의 예술경지를 교육에서 그 본보기를 보여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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