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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품 크기 | 미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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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조국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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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규격 : 가로36.5 세로27.3(cm)
400년전 쓰여진 김좌명 선생의 간찰입니다 ,
한장이 아니고 각각 별도로 작성이 된 2장의 편지입니다
역사적 인물들의 편지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두 쪽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기품 있는 행서체로 쓰여 있으며,
붓의 기운이 살아 있는 필획에서 문인의 품성과 학문적 내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좌명은 조선 후기에 드물게 육조판서를 역임하신분으로,
글씨에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의 글씨는 힘과 균형이 조화를 이루며,
과장되지 않은 자연스러움 속에 깊은 사유가 배어 있습니다.
첩(帖)에서 분리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래의 문집 혹은 서첩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묵색의 농담 변화와 필압의 강약이 섬세하게 조율되어 있으며,
문인의 내면 세계와 시대적 정서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김좌명 선생 소개
1616년에 김육과 윤급(尹汲)의 딸 파평윤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4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급제한 지 2년 뒤인 1646년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효종이 대동법을 실시하려 하자, 자진해서 책임자가 되었다.
1662년 공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고, 부친 김육과 송시열[3]의 제안에 따라 전라도에서도 대동법을 시행했다.
1차 예송논쟁 때 서인의 편을 들지않고 중립적 위치에 있다가 남인의 편을 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서인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668년(현종 9)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서인과의 관계가 악화된 탓에
외척이라는 이유로 탄핵당해 직무 한 번 못 보고 5일 만에 물러났다.
같은 이유로 품계는 생전에 이미 보국숭록대부로 정1품이 되었고
정승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나 관직은 2품을 떠돌아
공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를 거쳐 결국 원래의 관직인 병조판서로 되돌아갔다.
1671년(현종 12) 사망했다. 당시엔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김좌명 역시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
당시엔 김좌명과 같은 명문가 인사들까지 줄줄이 죽어나갈 정도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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