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센터
- 데일리경매 02-738-1268 (평일 10:00 ~ 17:00)
- 삶의흔적경매 02-738-0552 (평일 10:00 ~ 17:00)
- 주말 및 공휴일은 휴무입니다. (점심 12:00 ~ 13:00)
2주 전 월요일 ~ 일요일까지 입금완료일부터 배송완료일까지의 평균 소요 일수를 기준으로 합니다.
배송완료 건이 비정상 거래로 판단되는 경우, 집계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습니다.
물품 크기 | 미입력 |
---|
제조국 | 한국 |
---|
크기 가로 42.5 높이 26 (작은 사이즈로 측정하였읍니다) 6 매 일괄
오래된 물품으로 흠이 있을수 있읍니다(이미지 사진 참고해 주세요)
낙찰시 배송비는 후불을 원칙으로 하며 금액의 오차가 있을수 있읍니다( 우체국 택배)
민영소(閔泳韶. 1852(철종 3)∼1917)
조선 말기의 척신(戚臣).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순약(舜若). 철호(哲鎬)의 아들로, 규호(奎鎬)에게 입양되었다.
187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설서(說書)의 직책을 맡은 것을 시발점으로 장령·응교 등의 벼슬을 거쳐 1885년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춘천부사를 지냈다.
그뒤 호조판서·직제학·병조판서 및 한성부윤을 역임하였는데, 그 당시의 군변이나 정변을 무사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 기간에 일시 퇴진하였다가,
1895년 8월 민영환(閔泳煥)·심상훈(沈相薰) 등 민씨일파와 더불어 궁내부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
1899년 규장각학사와 규장각대교를 맡았고 이어 양지아문총재관을 지냈다.
1901년 학부대신, 1902년 궁내부대신, 1904년 농상공부대신·중추원의장을 두루 역임하였다.
민씨척족세력의 거물로서 임오군변 때는 가옥이 파괴당하는 곤욕을 겪었다.
병조판서로 있을 때 왕의 밀지를 받아 이일직(李逸稙)으로 하여금 갑신정변 뒤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암살을 교사하였다.
그뒤 홍종우를 자객으로 삼아 상해에서 김옥균을 살해한 배후의 인물로 부각되었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당할 때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1910년 이후 실의와 좌절 속에서 삶을 영위하였다.
영수증발행 : 온라인현금영수증(소득공제용 / 지출증빙용)
영수증신청 : 수령확인시에 개인소득공제용 또는 사업자회원님의 지출증빙용(세금계산서대체)으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주)코베이옥션에 등록된 상품과 상품내용은 개별 판매자가 등록한 것으로서, ㈜코베이는 중개시스템만 제공하며 해당 등록내용에 대하여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판매자가 사업자회원이 아닌 개인회원의 경우 판매자 정보는 [코베이옥션 결제처리] 이후 판매자의 연락처 등을 구매한 소비자에게 즉시 제공하게 됩니다.
코베이옥션은 구매안전서비스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서비스 가입사실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