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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지사 충정공 계정 민영환(閔泳煥. 1861(철종 12)∼190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서울 출신. 호조 판서 겸호(謙鎬)의 아들이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正字)ㆍ검열ㆍ설서(說書)ㆍ수찬(修撰)ㆍ검상(檢詳)ㆍ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해 6월 군제 개혁으로 인한 구식군대의 불만과 대원군의 재집권욕 등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1882년 폭발한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 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ㆍ전환국 총판(典圜局總辦)ㆍ홍문관 부제학ㆍ이조 참판ㆍ내무 협판ㆍ개성 유수ㆍ해방 총관(海防總管)ㆍ친군연해 방어사(親軍沿海防禦使)ㆍ한성 우윤(漢城右尹)ㆍ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 상리국 총판(商理局總辦)ㆍ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ㆍ호조 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893년 형조 판서ㆍ한성 부윤, 1894년 독판 내무부사ㆍ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1895년 8월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에서의 세력 우위를 점하고자 1894년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의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ㆍ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으로 뜻이 좌절되면서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일제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85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그는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尹致昊)ㆍ김득련(金得鍊)ㆍ김도일(金道一) 등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이때 인천을 떠나 상해(上海)ㆍ나가사키(長崎)ㆍ동경(東京)ㆍ캐나다ㆍ뉴욕ㆍ런던ㆍ네덜란드ㆍ독일ㆍ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여장을 풀었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이해 10월 하순 귀국하였다. 그 뒤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ㆍ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897년 1월 영국ㆍ독일ㆍ러시아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던 중 손병균(孫炳均)ㆍ김병옥(金秉玉)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에 들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각국 외교 사절을 예방하였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해외 여행으로 각국 특히 구미제국의 발전된 문물 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이를 극력 후원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정교(鄭喬)는 지금 정부 요인 중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한규설(韓圭卨)과 민영환밖에 없으므로 민영환을 군부 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면 민심이 수습될 것이라고 고종에게 상주까지 하였다.
1898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내부 대신 겸 군부 대신을 지냈으나,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의 지탄과 공격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참정 대신ㆍ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고, 그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원수부(元帥府)의 회계국 총장(會計局總長)ㆍ장례원경(掌禮院卿)ㆍ표훈원총재(表勳院總裁)ㆍ헌병사령관을 등을 역임하였고,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ㆍ대훈위이화장(大勳位李花章)을 받았다. 러일전쟁 후 다시 내부대신ㆍ군법교정총재(軍法校正總裁)ㆍ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친일 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였다. 1905년 잠시 참정 대신ㆍ외무 대신을 역임하였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난 뒤 외교권 강탈을 우려하여 무장이었던 한규설을 총리 대신으로 추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로 백관들과 연소(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批答)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자,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 : 재판소)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 육의전)에 모여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세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 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저술활동유고 중 대표적인 것으로 『해천추범(海天秋帆)』ㆍ『사구속초(使歐續草)』ㆍ『천일책(千一策)』 등이 있고, 그밖에 많은 소(疏)ㆍ차(箚)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 후하게 예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의 최고 관작이 추증되었으며, 의절의 정문도 세워졌다. 유해는 경기도 용인에 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상은 안국동 로터리에서 와룡동 비원 앞으로 옮겨졌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김영수(金永壽.1829년(순조 29)∼1899년)
경상도관찰사, 5조 판서, 한성부판윤, 대제학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광산. 자 복여(福汝). 호 하정(荷亭). 시호 문헌(文獻). 우현(宇鉉)의 아들. 1870년(고종 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876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오르고 이어 이조참의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이조참판을 거쳐, 1882년 예조판서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883년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호조 ·예조 ·이조 ·병조 ·공조판서를 지내고, 1885년과 1892년 2차례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그 뒤 홍문관대제학 ·궁내부특진관 ·의정부찬정 ·장례원경(掌禮院卿) ·의정부참정 등을 지냈다.
민응식(閔應植), 1844헌종10 ∼?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성문(性文), 호는 우당(藕堂). 본관은 여흥(驪興).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 같은 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의 저택을 명성황후의 은신처로 제공하여 출세의 길을 열었다. 1883년 혜상공국(惠商公局)의 총판(總辦)이 되었고 민태호(閔台鎬) 등과 결탁, 독립당에 압력을 가하였다. 뒤에 척족세도의 중심인물로서 민영익(閔泳翊) 등과 함께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운동을 제창, 1892년(고종 29)에는 이른바 황두배상문제(黃豆賠償問題)를 극력 반대, 민병석(閔丙奭) 등과 함께 김옥균(金玉均) 암살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예조판서·호조판서·경리사·통어사·도총제사 등을 역임하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개화파내각이 성립된 뒤 물의를 일으켜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
조강하(趙康夏) 1841(헌종 7)~?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평(景平). 현령 병석(秉錫)의 아들로, 영하(寧夏)의 동생이며, 조대비(趙大妃)의 조카이다. 1864년(고종 1) 조대비의 일족이 대거 등용될 때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권점(翰林圈點)·관록(館錄)·도당록(都堂錄)에 잇달아 오르고, 1873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그를 전라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하였으나, 형 영하가 대원군을 축출하여 부임하지 않았고,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때 진휼을 요청하여 내탕전(內帑錢) 2만 냥과 관서곡(關西穀) 2만 석을 받았다. 진주와 대구 고산초등학교, 경상감영공원에는 그의 선정비가 세워졌다. 경관(京官)으로 있을 때에는 칭송이 없었지만, 지방관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내직에 들어와서도 경상도의 환곡(還穀)과 통영곡(統營穀)의 탕감을 직접 주청하기도 하였다. 1885년에 지춘추관사·공조판서·지의금부사가 되었고, 좌우포도대장이 되어 갑신정변 여당을 추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화당으로 지목을 받고 있던 유길준(兪吉濬)이 1885년에 귀국하자, 포도대장이 거짓으로 왕명을 빙자하여 그를 구금하자 조경하가 민응식(閔應植)에게 말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고 한규설(韓圭卨)의 집에 유폐되도록 하였다. 뒤에 선혜청제조·한성부판윤·예조판서를 지냈고, 1889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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