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거장 제백석(齐白石) 초기 1884년 정통 대사의화 老虎(호랑이)
작품부분크기 41.6x54.3cm , 원장 표구배접크기 45x65cm
제백석(치바이스.齊白石,1864-1957) 초창기 오리지날 사의화 영모도 '老虎'입니다.
마치 '조선민화 호랑이'처럼 보이는 작품으로 중국 전통 대사의화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제백석의 사의화 풍경화 등 바보산수화풍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만
대부분 전성가기나 그 이후의 적당히(?) 민화풍인 소사의화들이며,
본 작품처럼 초창기의 순수 대사의화풍의 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본 작품은 또한 제백석의 수많은 사의영모도 호랑이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대사의화의 정수와 형태를 보이는 정통사의화 작품입니다.
또한 제백석이 쓴 본 작품의 화제(畫題)를 보면, 청대에 그린 본인 작품을
민국후기에 다시 만나 초심을 돌아보는 감회를 싯구처럼 길게 써넣었습니다.
특히 다작을 한 제백석의 작품 중에는 수십년이 흐른 후 다시 만난 작품에
이같이 새로 화제를 적은 작품을 가끔 볼 수 있으며, 명대의 동기창 부터
현대 서비홍 오관중 등도 다시만난 작품에 화제를 쓴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본 작품 화제에는,
此幅乃予二十歲時之作,八十以後重見,其才六十年筆墨自有是非...
"이 그림은 20세 때의 작품으로, 80세 이후에 다시 보게되니, 그 60년(간극)의 필묵(화풍의 변화)은
(각자 나름의)스스로 옳고 그름(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라고 써 있으며
마지막에 '탄식(?)'이라는, 회한이나 그 유사한 의미로 해석된 수 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대략의 의미를 풀어보면,
제백석이 민국시대 후반에 본인이 청대후기 스무살(1884년)때 그린 작품을 만났고
당시는 80대의 제백석이 후반 전성기를 맞아 최상의 명성을 구가하던 시기였습니다.
어느 정도 명성과 대중의 인기 등에 부합한 작품을 창작하던 시기,
본인이 원래 추구하던 젊은 시절의 순수 대사의화 화풍의 작품을 다시 만나
젊은 시절 미술을 대하던 절박하고 순수한 마음과 초심을 떠올리며
민국시대 이후 남황북제(南黄北齐-남쪽에는 황빈홍, 북쪽에는 제백석)이라는
최고의 대가로 등극한 제백석의 어린 시절 가정형편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제백석의 어린시절부터 그에게 미술의 재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끼니조차 잇지못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생계를 위해 목수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시기가 확실치는 않지만 제백석은 어린시절 목수를 도와 허드렛일을 시작한 후
1877년 열세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목공을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십대 후반부터 최악의 가난을 벗어나며, 짬짬이 본인의 꿈이던 미술작품을 창작하였고
다시 그를 계기로 주변에서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목수목공 일에서
건축목재조각을 시작하며,목재조각과 밑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며
세기적인 서화대가이자 전각의 대가 제백석의 기초를 이루게 됩니다.
그 후 1888년부터 본격적으로 미술학습과 창작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제백석이 생계를 위한 그림을 그려 판매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이후라고 합니다.
10대에 스스로 그림의 재능을 발견하고 창작하기 시작한 제백석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러운 대사의화(민화,바보산수풍)를 창작하며,
자연스럽게 청대말 오창석 등 해상화파 사의화의 영향을 받았다 합니다.
그러나 청대말 목수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제백석의 형편에서는
당시 대중적인 인기가 없던 대사의화는 그야말로 여유로운 사치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판매하기로 하며, 본인이 원하던 대사의화를 접어두고
판매를 위해 대량 패턴 창작작품이나 임모도를 그렸으며,
대부분 정통 산수화나 화조도 혹은 길상화 종류들을 주로 그려야 했습니다.
1950년대 제자 최자범 전시회를 둘러본 제백석은
"자네 그림이 진정한 대사의화이니 내 화풍을 따르지 말고
자신의 화법대로 그려라"며 본인이 원하던 사의화 본연의 정수가 진하게 풍기는
제자 최자범의 대사의화작품을 극찬하였다 합니다.
제백석 초창기 일부 대사의화들은 추상 낙서같은 필선과 색감입니다만
한편 선화(禪画)처럼 깊은 경지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제백석의 최초창기 작품들은 작품집이나 자료에서나 일부 볼 수 있으며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매우 희귀한 작품입니다.
대사의화는 사의화 화풍 중에서도 좀 더 거침없고 과감한 화법을 말하는 것으로
추상적인 요소를 극대화하면서 중국 전통화의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화풍입니다.
문인화풍의 소사의화와, 더 과감하고 꾸밈없는 대사의화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경매사진이미지에 본 작품 표구 배접에 세가지 형태를 보이고 있어 따로 설명을 드립니다.
1, 현재 상태는 첫번째, 두번째 사진의 상태입니다.
두번째 사진처럼 민국시대 원장배접 상태 그대로 뒷부분에 흰 비단이 받쳐진 상태입니다.
2, 세번째 네번째 사진은 경매에서 낙찰받았던 민국시대 원장배접 그대로
대형 목판비단 화첩으로 꾸몄던 사진입니다. 그러나 작품반입시 화첩을 제거하고
두번째 사진처럼 화첩에서 작품과 비단부분만 챙겨 다른 작품들과 함께 말아서 반입한 것입니다.
3, 마지막에서 세번째 사진은 민국원장과 그 속에 있는 청대배접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네 장의 사진이 사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중 좌측의 두 장은 경매에서 낙찰받은 민국시대 원장배접상태이며,
뒷면 우상변에는 출품화랑과 경매회사의 소형표찰(라벨)들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우측의 두 장의 사진은 현재 상태에서 빛을 비추면
안쪽에 남아있는 청대 원장배접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만 빛을 비추면 오래된 배접흔적을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정리를 드리면,
청대의 오리지날 배접이 낡아 민국시대에, 옛날 청대 오리지날 배접을 그대로 둔 채
뒷면과 테두리 덮어 배접 보강을 하여 유리 액자에 넣어 감상 소장하던 작품을,
경매 낙찰을 받은 후, 민국시대 배접 상태 그대로 비단에 얹어 대형화첩을 만들었고
반입시 다시 화첩을 제거해버리고, 화첩 비단부분만 취해 현재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매우 희소하고 독특한 배접이력 등으로 사설이 복잡하고 장황했습니다만,
거장의 명성만큼 인터넷, 작품집, 경매도록 등 많은 자료검색이 가능하므로
본 작품의 상태와 특징 등 간략한 경매설명와, 사진으로 비교검토하시어
빠짐이 없는 본 작품의 화풍과 재질 연대 등을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경매문의 중 영인본,인쇄본 여부에 관한 문의가 가끔 있습니다. 영인본은 작품이 아닙니다.
복제공예품,혹은 인쇄품으로 표기해야 하며,영인본을 작품이라고 절대 표기할 수 없습니다.
따로 설명이 없더라도 판매자의 모든 원본경매작품들은 영인본,인쇄본이 한 점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