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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품 크기 | 40. 7cm×54.4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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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조국 | 한국 | 연대 | 1900년~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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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 1931년(昭和 6년) 12월 14일 월요일
4면 (1,2,3,4면)
상태: 좋음
2면: 상단 중앙에 <공산당재건사건 12명 명일송국- 윤자영 서중석 등이 중심인물. 보정서활동 일단락>이란 기사에 <조선 공산당 재건사건에 대한 보도>...
*윤자영(尹滋英,1894-1938). 윤자영(尹滋瑛, 1894년 9월 13일 ~ 1938년 10월 14일)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청송 출신으로, 1919년 3·1 운동이 발생했을 때 경성전수학교 학생이었다. 윤자영은 만세운동에 학생 대표로 참가하여 김원벽(연희전문학교), 강기덕(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한위건(경성의학전문학교), 김대우(경성공업전문학교)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출옥 후에는 곧바로 청년운동에 투신했다. 청년운동 역량의 결집을 위해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고, 서울청년회 기관지 《아성(我聲)》 편집위원으로 기고 활동을 펼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 전에 일본 유학생들 위주로 결성되었던 신아동맹단이 3·1 운동 이후 확대 개편한 지하조직 사회혁명당에 1920년 가입하면서 좌익 운동에 입문했다. 1921년에는 노동운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설립에 가담했고, 사회혁명당이 한인사회당과 연합하여 결성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에도 입당했다.
이후 국외로 망명하여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상하이파 대표로 파견되어 고려공산당 개조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개조파의 일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 김지섭의 니주바시 폭탄투척 사건을 지원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끈질긴 추적을 받았으나, 그는 잡히지 않고 청년동맹회와 오르그뷰로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26년 만주로 이동하여 상하이파와 화요파가 연합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총국 책임비서 조봉암)을 결성했다. 1929년 12월 테제가 발표된 후에는 김철수가 책임을 맡은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윤자영이 속한 상하이파는 12월 테제 발표 이후 화요파, 엠엘파와 달리 국내 거점 건설을 목포로 국내에 복귀했는데, 윤자영도 이때 함흥부에 잠입했다가 검거망을 피해 탈출했다.
북간도로 탈출한 윤자영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동방공산대학 재학 중이던 1934년 스탈린의 사상 투쟁과 관련하여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추종했다는 혐의를 받아 구금되었고,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 주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해 총살되었다.
윤자영은 3·1 운동으로 민족운동에 뛰어든 뒤 상하이파의 대표적인 활동가로 오랫동안 활약했으나, 좌익 계열 인물이었고 소련에서 일찌감치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라 독립유공자 선정이 늦어졌다. 2004년에야 광복 전인 1938년 이미 총살형이 집행된 것이 밝혀져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이는 2004년 건국훈장 서훈자 가운데 좌익 독립운동가로서는 가장 훈격이 높은 포상이다.
*서중석(徐重錫, 1904년 ~ ?)은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횡성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서완석의 형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 강습과를 중퇴했다. 1926년 신흥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1927년 가을 연길현 현립 제39학교, 건원학교 교사가 되었다.
1928년 여름 중국 길림에서 길성청년회 창설에 참여했고, 10월부터 신일용이 경영하던 광동병원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1929년 1월 남만 청년총동맹의 간부로 선출되었다. 그해 가을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10월 고려공산청년회재건설준비위원회 만주부를 조직하고 선전부 책임자로서 기관지 편집에 관여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서, 2월 동만특위 산하 조선국내공작위원회 공작원으로서 조공 재건을 위해 입국했다. 3월 경성부에서 오성세가 지도하던 공청 가드야체이카를 인계받아 학생 경성제대야체이카로 개조했다. 4월, 메이데이를 앞두고 격문을 제작하여 서울 공장지대에 살포했다. 5월 초 개성으로 옮아가 개성야체이카를 조직했다. 7월 서울로 돌아와 조직을 수습하는 한편 조선국내공작위와의 연락을 재개했다. 8월 서울에서 국내공작위원회야체이카를 결성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달 학생부문 야체이카를 결성했다. 9월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반대파의 조직과 임무'를 제작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반전'(反戰) 팸플릿 '전만주를 삼킨 제국주의전쟁과 혁명적 노동자, 농민의 임무'를 제작, 배포했다. 같은 달 반제동맹 결성을 지도했다. 10월 '조선의 혁명적 학생운동의 임무(잠정 테제)'를 제작했다. 11월 적색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적색투보'를 제작했다. 같은 달 중순 검거되어 1934년 6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수감중 옥중투쟁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징역 8개월이 추가되었다.
1939년 출옥하여 경성콤그룹에 가담했다. 1940년 12월경 경성콤그룹 탄압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1944년 11월경 이정윤 등과 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고 책임자로 활동했다. 영등포 일대에서 소규모 노동자써클을 지도했다. 국외 무장세력 및 소련과 군사협력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김일수를 소련으로 김태준을 중국 옌안으로 파견했고, 여운형과 조동호가 결성한 조선건국동맹과 함께 통일전선 결성문제를협의했다. 1945년 3월 발각되어 검거되어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때까지 옥중 생활을 지낸다.
광복 이후 출옥했다. 출옥 직후 조선공산당 장안파 결성에 참여했다. 9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및 선전부장 대리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중앙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박헌영 중심의 당재건운동만을 당사(黨史)의 정통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비판했다. 6월 조선공산당 서기국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대회파의 일원으로서 '합당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 제군에게 고함'을 공동 발표했다가 무기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같은 달 한때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었다. 11월 사회노동당 창립에 관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자기비판'을 성명하고 남조선로동당에 참여했다. 1947년 1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이 되었다. 2월 이후 북조선로동당과 직접 연결되어 활동했다.
4면: 좌측에 <동래사회단체 연합회관낙성-연와2층의 굉대한 건물, 11일에 성대히 거행>이란 기사와 사진.. 내용에 낙성식 순서 중 <..축사...임석경관으로부터 축사중지를 당하고> 운운...
-신문연재 장편대중소설 <해조곡(26)> 윤백남 작, 이청전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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