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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 크기 | 15.3×22.4cm. 17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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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국 | 한국 | 연대 | 1960년~19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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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22.4cm. 175쪽. 원래의 책을 미군용 포장지인 듯한 두꺼운 종이표지를 덧대어 두 번 꼰 종이끈으로 묶어 다시 제본한 상태이다.
▒ 단기4279년(1946년) 강원도 춘천부 본정 북성당서점에서 발행한 원동윤 저, <新編朝鮮史>이다.
덧댄 표지에 제목과 다른 글씨들이 남아 있다. 원래의 표지에는 제목 아래 "경성대학 예과 교수 김종무 서"라는 말이 있고 현무도 도판(제호와 함께 柳東植 선생 필)이 붉은색 잉크로 인쇄되어 있다. 붓글씨로 "1의 3 최현지"라는 책주인의 이름도 남아 있다.
경성대학이란 국대안반대운동으로 서울대가 되기 전의 경성제국대학이 해방 뒤 불린 이름이라 추정되며, 김종무 교수는 서문에서 왜정 아래 연구도 못하던 진역(震域:우리나라)의 역사가 해방 이후 10여 종 나왔으나 진정한 계몽에 도움될 만한 것이 적다며 초고의 서문을 부탁해온 원동윤(元東潤) 선생의 글을 보니 "상은 국조건국으로부터 하는 해방의 금일에 이르도록 일일히 사실을 충실히 기록하되 전부 한글로 기사하여 일반대중의 이해에 편ㅎ게 하고 유리완동과 낙랑고각 같은 사화까지 일일히 역재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대의 흥미"를 가지게 했을뿐더러 "이 책이야말로 일편의 통사인 동시에 사화의 집대성이니 그 유에 뛰어나는 오히려 그보다 유일독자의 경지를 개척한 호개의 출판물"이라고 소개함과 동시에 저자를 "현재 춘천사범의 교유이며 다년간 예맥의 고강인 영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국사의 연찬에 심혈을 경주"하기를 "10여년 적공의 성과"라 하였고 또 남궁 선생의 훈도를 받은 연구로 "남궁씨의 우국의 열루와 우두 소양의 승경이 필자를 격려고무하여 이 일서를 인행ㅎ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할 것"이라고 하였다.
1945년 개천절 봉의산 서록 신재(愼齎)라고 쓴 <자서>에서 저자는 "지금으로부터 18년전 방초가 파릇파릇하여 가는 봄에 필자는 죽장망혜로 고 남궁 선생 문하를 찾아 산천이 수려한 홍천 모곡에 들어가니 흐르는 청간수 지저귀는 수림조, 이곳이 과연 두문동이요 무릉도원이었다. 3년간 송풍라월에 몸을 던저 낮이면 어린아해들 글 가르치기와 뽕나무와 무궁화 심으기 밤이면 달빛 아래 골방을 찾어 왜정경찰의 눈을 피해가면서 옛 할아버지들 살림살이하든 이야기를 공부"하였다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고려사 이조실록 등 유사를 근거삼아 과거를 기록"하다가 해방이 되어 "대중이 볼 수 있도록 국문으로 쓰고 철자법은 김세한 선생의 정정의 수고를 얻어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고 하였고 "없는 사실을 꾸미지도 아니하고 옛날 할아버지들의 생활전모를 그대로 씬 것을 본서의 특질이라고 사료하는 바"라 하였다. 김종무 교수는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서울문리대 교수였으며(1991년 83세로 사망), 김세한은 60년대에 남궁억 선생의 전기를 집필한 사람, 유동식은 기독교계의 원로신학자로서 특히 단군신화나 풍류도를 우리 고유의 영성이라고 해석한 사람이다.
저자의 스승인 남궁억(南宮憶:1863-1939년)은 독립협회와 황성신문 사장으로 활동한 사람이며 구금을 거치다 1906년에는 양양군수로서 현산학교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에 나섰고, 이후 대한협회나 관동학회로 활동하다가 나라가 병탄된 뒤에는 배화학당 등에서 애국가사나 한글서체 창안 등 교육운동을 하였다. 1918년 건강이 나빠지자 선조의 고향인 홍촌의 보리울(모곡)로 낙향하여 1919년에는 모곡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적 찬송가 및 무궁화 보급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일제 경찰은 1933년 선생과 제자들을 잡아들여 '십자가당사건'을 만들어 선생을 8개월간이나 구속하였고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원동윤이 찾아가 공부한 시기인 1930년부터 3년은 선생의 구금 전까지였던 셈이다. 남궁억 선생도 <동사략>, <조선이야기>와 같은 저술을 남겼다.
서문은 국한문을 섞어 썼으나 본문은 전부 한글로 쓰고 한자는 괄호 안에 넣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한글 사용의 실례를 보였다. 전체는 상고사(옛조선,열국시대), 중고사(삼국), 근고사(고려), 근세사(조선), 최근세사(광무황제~건국 당시까지)의 5편으로 구성하여 각각 장절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맨앞에 단군조선을 서술하였고, 삼국 각각을 따로 서술하였으며 신라에 발해를 북조로 나누어 편입시켜 서술하였다. 세종대왕의 공업에서 한글을 소개하였고, 특히 조선 마지막에는 "천주교의 들어옴과 그 박해" 절을 두었다. 최근세사에는 삼일운동 부분(이곳은 국한문 혼용)에서는 그 동기가 되는 비사를 소개하며 오세창, 권동진, 최린의 모사를 상세히 적었으며 유림이 빠진 것에 대해 "사실인즉 김창숙 씨가 참가키로 되었다가 선언발표하는 3월 1일까지 경성까지 오지 못하여 33인중에 연명되지 않었든 것이다"라고 하였고 당시의 오세창 사랑댁은 1945년 여름에 헐리고 없다는 말까지 해놓았다. 독립운동은 국내 위주로 서술하였고 해외의 운동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간기 뒷면에 "강원도 춘성군 서면 현암리 한정교"라는 파란잉크의 펜글씨가 한자로 적혀 있다.
원동윤의 행적은 1930년 강원도 초등교원 3종합격이라는 기사가 동아일보 9월 8일자(3면)에서 확인되었고, 이후에는 1962년에 교단 연공자표창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는 동아일보 11월 10일자(4면) 기사에서 상세한 경력소개를 볼 수 있었다(아래 사진 맨끝 참조!).
▒ 종이에 얼룩이 지고 모서리가 닳고 접혔으며 간간이 공부한 흔적도 보이나 나머지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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