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품 크기 | 21/31/1 | ||||
---|---|---|---|---|---|
제조국 | 조선 |
조선 후기 문신·학자 김창협(金昌協, 1651년~1708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 삼주(三洲). 시호는 문간(文簡). 경기도 과천 출신이다.증조부는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영의정을 김창집(金昌集)이 형이다. 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모는 안정나씨(安定羅氏)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출사하였다. 이어서 병조좌랑 · 사헌부지평 · 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 · 이조좌랑 · 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 이조정랑 · 집의 · 동부승지 · 대사성 · 병조참지(兵曹參知) · 예조참의 ·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명에 의해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주1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 · 예조참판 · 홍문관제학 · 이조참판 · 대제학 · 예조판서 · 세자우부빈객 · 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학문적으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김창협의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여 구양수(歐陽修)주2의 정수를 얻었으며, 김창협의 시는 두보(杜甫)주3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특히,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 · 「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 · 「김숭겸표(金崇謙表)」 · 「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의 작품을 남겼다.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표지 4,5.6.13책 일부 침수 훼손, 4책 상단 우측 쥐쏠림있으나 본문은 훼손없이 완전, 반품불가, 반품시 반품비용 구매자부담조건 판매, 사이즈는 정확하지 않음